(자원활동가 편지) 우리는 이야기 나누기를 연습합니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7/04/19
우리는 이야기 나누기를 연습합니다
밀린 숙제를 해내듯이 꽃들이 우수수 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바쁜지 이파리들이 또 우수수 돋아납니다. 이것도 해내고 저것도 해내야 해서 정신없는 것이 꼭 내가 사는 모습 같고, 내 친구들 사는 모습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봄이 원래 이런 계절이었나.
서울인권영화제는 매주 목요일 마다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는 진짜 이상한 회의입니다. 저녁 7시에 시작해서 11시까지 네 시간 동안 회의를 하는데 그 중 두 시간은 서로의 일주일 생활을 나누며 보냅니다. 그게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모두의 한 주 생활을 다 들어야 비로소 안건지를 집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라 보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들 듣습니다. 그것이 너무 바보 같은 얘기이거나 하늘이 무너지는 얘기라도, 아니면 정말 별것 아닌 얘기일지라도. 누가 기뻐하면 다들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낄낄거리고, 누가 슬프면 너나 할 것 없이 탄식하고 눈물 흘립니다. 그렇게 훌쩍 두 시간이 갑니다.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주 동안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는 순간이 저 이상한 회의시간은 아닐까. 매일매일 보는 친구들과도 그렇게 가만 앉아 떠드는 시간은 많지 않더랍니다. 지나가면서 인사 한 번, 담배 피우다 만나면 10분, 저녁 먹으면서 30분. 온전히 내 얘기 네 얘기 나누기에는 다음 할 일들이 너무 바쁘니까요. 꽃 다 피우자 이파리 내놓을 때를 맞은, 정신없는 꽃나무들 마냥.
이야기 나누지 못하는 일상은 얼마나 서글픈지 모릅니다. 그리고 때로는 꺼내고 싶어도 잘 꺼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기도 합니다. 언제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맘 졸이고 기다리는 시간은 또 마음을 괴롭게 하는지요. 그럴 때 온전히 이야기 들을 준비만을 하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싶습니다. 그러면 저 이상한 회의시간이 참 소중해지는 것이지요.
이 시간은 연습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이상한 회의 자리에서, 이야기 듣고 나누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영화제가 준비하고 있는 영화들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그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어서 얼마나 맘 졸이고 살아왔을까요. 또 어떤 이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놓으려 영화제에 찾아올까요. 그 어떤 이들을 온전히 만나고 싶어서 저는,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매주 이야기를 꺼내놓고 듣는 연습을 하고 있더랍니다. ★★그런 우리들, 여름 꽃 피어나는 유월에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요. 히★★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