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활동가 편지) 이 편지가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8/01/31
안녕, 나는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어. 너는 오늘 어땠어? 지난밤 깊은 어둠 속에 집어 삼켜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어. 나는 그동안 나의 병 때문에
허무하게 날려버린 시간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살아있을 이유가
있나 싶기도 했고, 나의 병은 곧 나를 나약하게 만들어 견딜 수 없게 했어.
또 나처럼 스스로가 나약하다고 자책할 너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이제는 그날들을 지나오면서 깨달았어. 그 시간을 견뎌왔던 나는 나약하지 않다는걸.
외롭고 힘들었던 시간을 혼자서 버텨왔을 나를, 너를, 우리들을 어떻게 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니.
적어도,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어. 하지만 네가 나약한 사람이라도
상관없어. 너의 주변 사람들은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좋아해 줄 거야. 안심해도 괜찮아.
나는 종종 견딜 수 없는 감정들이 나를 덮쳐서 힘들어. 모든 것들이 나를 짓 누르지.
그때마다 나는 나에게 편지를 써. "우리 내년 겨울의 하얀 눈을 보지 않을래?
그 하얀 풍경을 다시 눈에 담아보고 봄을 맞이하면 예쁜 꽃들도 보고 좋아하는 곳으로 여행 가지 않을래?"
당장 앞에 있는 미래를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이렇게 나에게 편지를 쓰고 나면
조금은 살고 싶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문장들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줘. 나는 큰 걸 바라지 않고
앞으로 살아남아서 하얀 눈을 보며 벅찬 감정을 느끼고 싶어. 그리고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오후 내내 좋아하는 책을 읽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맛있는 걸 먹는, 그런 목표를 세웠어.
요즘은 이 목표들을 지키기 위해 약도 꾸준히 먹고 밥도 잘 챙겨 먹고 그래. 사랑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어줘서 다시 일어서고 또 주저앉고를 반복해. 그렇지만 이 시간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또 이 시간을 지나쳐오면서 많은 걸 배울 거라고 생각해.
날이 추운데 감기는 안 걸렸니? 난 독감에 걸려서 고생했다가 이제 괜찮아졌어. 나는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투병기간 동안 내가 이번 겨울에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어. 참 신기하지.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2018년을 맞이했고, 내가 좋아하는 활동도 하고 있어. 가끔 일하다가 내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서 조금 슬퍼. 그렇지만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으니까.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어.
1년이 지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 겨울은 너무 추워서 움츠려있는
우리를 알아보고 가끔 우울이 감싸 안으러 오지. 우리, 긴 우울에 잡아먹히지 말자. 서로 의지하고
버텨서 봄을 맞이하자. 나는 너와 함께 봄을 맞이하고 싶어. 다음 봄에도 꼭 꽃구경 같이 가자.
안녕, 이 편지가 긴 겨울 동안 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햇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