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펼치기) 안녕하세요, 채영입니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8/02/14
안녕하세요, 채영입니다.
지난 2월 8일. 저는 한 달 만에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여행을 마친지 이틀이 된 날로 한국에 와서 처음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었어요. 자괴감이 한창 깊어지고 있었던 날이기도 합니다. 긴 여행의 끄트머리에 시작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방향을 잃고 저를 찌르는 화살이 되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달이라는 공백이 얼마나 큰 어색함을 줄까, 하는 고민이 발에 툭툭 채였어요. 그러나 올해 복학하는 학교생활보다 더 열심히 해보고 싶은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이기에 저를 잘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긴장감으로 묵직했지만 마음 한켠은 설레었습니다. (뿜뿜)
그동안 세미나에서 다룬 영화들을 뒤늦게 보기 위해 회의시간보다 일찍 사무실로 갔습니다. 레고와 고양이들과 삼삼하게 인사를 나누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제가 본 영화는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씨씨에게 자유를>, 두 편입니다.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동일본 대지진이 난 후, 장애인들이 피난에 어떠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지금까지도 생활을 회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현실과, 그들과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이제까지 사고 소식을 들으면서 어린아이들에 대한 걱정까진 해보았지만 장애인들의 대피에 대한 걱정은 머릿속에 쌀 한 톨 만큼도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사회의 문제에 대한 태도, “오래 걸려도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것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원칙 자체는 새롭다 할 발상은 아니지만 위기 상황에서 ‘효율성(경제성)’에 대한 압박을 이겨내고 있는 그 꿋꿋함을 한국 사회에 비추어보며 반성하고 고민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유색인종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미국사회의 폭력적 현실과 생존자들의 연대, 나아가 ‘인권을 존중하는 처벌’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씨씨에게 자유를>은 매우 흡입력 있는 영화였습니다. 평소 트랜스젠더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져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도 계속 생각나면서, “우린 살아남았다.” 라는 절박하기만 했던 메시지가 영화를 본 후, “우린 살아남았다. 그것으로 우린 충분하다.”라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두 영화를 보면서 사회에서 ‘너의 이러한 면은 정상이 아니야.’라는 평가를 지속적으로 당했을 때, 결국 그 평가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어 나중엔 자기 자신이 가장 가혹한 ‘사회의 눈’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런 식으로 사회의 ‘정상’이라는 규범은 소수자/약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미나를 함께 했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민을 확장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쉬워요..!
< 전체사진 1, 2 회의를 하다 보면 활동가들의 표정 변화가 똑같아진다. 밝았다가, 무표정해졌다가. 분위기가 무거워지다가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툭, 씨앗 터지듯 웃음이 터져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회의는 역시나 ‘생활 나누기’로 시작되었는데요, 저에게는 첫 생활 나누기였어요. 속기 읽으면서도 ‘와 정말 오랫동안 하는구나.’ 싶었는데 실제로 하니까 시간에 대한 압박 없이 서로의 일주일을 공유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제 안에서 불쑥불쑥 ‘이렇게 길어져도 되나. 뭔가 효율적이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생활나누기를 마치고 나니 좀 부끄러워졌어요. 자신의 고민도 나누고, 가슴 아픈 일도 나누고, 기쁜 일도 나누고 나니 심정적으로 회의에 오신 분들과 가까워진 느낌이 들더군요. 다음에 만났을 때 궁금해 할 것도 생기고요. 마음의 낯가림 시간이 꽤 긴 저에게는 친밀해지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시간이었어요.
이번 회의에서는, 시간 관계상, 참석자 비율 또한 감안하여 세미나 평가와 활동팀 나누기는 생략하고 인권 영화를 주제로 인터뷰한 내용을 공유하며 인권 영화가 무엇인지, 영화를 선정할 때 어떤 생각을 갖고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했어요.
주변인 인터뷰를 한 후 친구들이 의외로 인권에 대한 고민이 있어서 놀란 분도 있고 무관심에 상처와 실망감을 얻은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인권 영화다.’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영화들은 있는 반면, 무엇이 인권영화인지, 인권영화제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에는 여러 난점들이 발생하는 것 같다는 공감도 나누었어요.
논의 때 나온 기억 남는 편견/오해는 1. 핵노잼, 2.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지만 의리로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영화들, 3. 동성애 나오는 영화, 였어요. 현실에서 이런 얘기를 들으면 아니라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앞서지만 설득력이 부족한 말들만 떠오르는, 그리고 일면 동의가 되는 것들이었어요. 저는 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작된 물음이었던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많이 갖고 있는 인권 영화에 대한 편견을 어떻게 자극할 수 있을까?” 에 대해 더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제를 할 때쯤은 각각의 편견과 오해를 들으면 영화를 하나 처방해줄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되고 싶네요. ‘영화를 처방해 드립니다. :-)’
다음 주에는 설 연휴가 되기 전에 시골에 내려가야 하는 바람에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어요. 활동팀을 나누고 국내작 선정 논의도 하는 중요한 자리에 빠지게 되어 아쉽네요. 텔레그램으로, 속기 읽기로 계속 참여하도록 노력할게요!
아직 낯선 사람들이지만 같은 것을 준비하고 알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형성된 은은한 신뢰감이 느껴져 좋은 시간이었어요.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저에게 날아오던 화살촉이 사무실에 있는 동안 저를 잘 비껴나간 것 같습니다. 다희 님의 말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산의 초입에 서 있다고 해요. 운동 전엔 워밍업을 잘 해야 안 다친다죠. 지금의 설렘과 열정을 잘 조절하여 하산까지 무사히 마쳤으면 좋겠어요..!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