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나눠요) 누가 침묵을 강요하는가, <섹스, 설교 그리고 정치>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8/02/27
(사진) 22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섹스, 설교 그리고 정치> 스틸컷. 메가폰을 든 활동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낙태가 불법인 브라질. 브라질에서 낙태 수술을 받으러 갔던 잔디라는, 시체로 발견된다. 영화 <섹스, 설교 그리고 정치>는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묻는다. ‘누가 잔디라를 죽였을까?’
#브라질의 복음주의 기독교
복음주의 기독교와 보수파 의원들은 망설임 없이 잔디라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잔디라 스스로라고 말한다. 그 위험을 알고도 결정을 내린 잔디라의 결정, 경솔함이 잔디라를 죽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복음주의 기독교 의원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쉽고 자극적이어서 머릿속에 쉽게 들어온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촘촘히 짜인 말들은 그 언어를 이해할 시간만 주고 삶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단어들을 받아들였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치들은 분명하다. ‘도덕적인, 천국에 갈 수 있는 여성’, 교회 커뮤니티 안에 안정적으로 속할 수 있는 것.
이해하기 좋고, 대가가 분명해 보이는 이 말들 속에는 하지만 없는 것이 있다. 미묘해서 말해지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삶들.
#me, too
한국에서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성폭력 공론화가 이어지고 있다. Me, too (나, 또한)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자신 또한 성폭력에 대한 증언들이 계속되는 중이다. 혹자들은 이 증언들에 대한 반응으로 경찰에 신고할 것 혹은 사건의 해결을 말한다. 또한, 다른 정치적 문제 사안을 덮기 위해 성폭력을 가십으로 터트리고 있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하지만, 누가 잔디라를 죽였을까?
태아의 생명권을 말하는 목소리들은 9개월간 임신을 하며 일어나는 몸의 변화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임신한 여성이 겪게 되는 사회적 상황들에 대해, 아이를 낳고 난 이후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사회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함께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말하는 목소리들은 성폭력을 없었던 일로 하는 게 더 쉬웠던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않는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묵인되는 이유는 복잡한 권력관계(가해자가 선배이기 때문이고, 교수이기 때문이고, 힘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임)들 때문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폭력 공론화가 다른 정치적 문제 사안을 덮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폭력이 얼마나 정치적인 일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누가 잔디라를 죽였을까? 위험한 줄 알면서도 낙태 시술소로 향하던 잔디라일까? 위험한 줄 알면서도 낙태 시술소로 향해야 했던 잔디라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 관계가 폭력임을 알면서도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피해자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을 듣지 않은 채로 끊임없이 내뱉어지는 말들은 끝까지 저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맞서다. 마주하다. 저항하다.
<섹스, 설교 그리고 정치>의 삶들은 혐오의 말들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커밍아웃한 의원은 의회 안에서 “이런 사기행각에 동참하고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하고, 여성들은 “모든 아메리카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다”라고 외친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며 혐오의 소리에 저항한다. 나의 삶은 당신들의 언어 속에 없다고 계속해서 외친다. 거리에서, 길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는 말들에, 하지만 삶이 있다. 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