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활동가 편지) 우리는 매번 먼 길을 돌아갑니다

(자원활동가 편지) 우리는 매번 먼 길을 돌아갑니다

몇 달 전 처음 찾아온 이곳 서울인권영화제는 참 비효율적인 공간입니다. 영화제를 만들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정신없고 바쁜 마당에 우리는 매번 먼 길을 돌아갑니다.
처음 만나던 날부터 몇 가지 정보와 숫자들만 묻고 답했더라면 진작 서로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참 느긋하게도 여전히 서로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삶의 궤적을 지나쳐왔는지, 마음을 기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솔직히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의 속도가 상대방을 재촉하진 않는지, 누군가 마음이 지쳐가고 있지는 않는지 찬찬히 살피고 서로를 마음으로 돌보고 돌봅니다. 성급하게 말하지 않아도, 꺼내기 어려운 얘기를 애써 내보이지 않아도, 이곳을 둘러싼 공기와 마음들은 우리를 충분히도 이어주곤 합니다.
우리의 활동들도 정말 비효율적입니다. 사실 한 두 명이 금세 결정을 내리고 해치웠더라면 속 시원하게 끝났을 일들도, 모두가 다 달려들어 구태여 또 시간을 늘리고 맙니다. 그 속에선 또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공유하고, 이해해야만 하는데, 여기에도 참 많은 시간이 들어갑니다. 때론 이런 기약 없는 과정들에 지칠 법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를 보채지 않습니다. 그렇다할 결과물이 없더라도, 나의 노력이 보잘 것 없어보여도, 모두들 아무런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영화제에선 할 일들이 쌓여도 흔쾌하고 산뜻한 마음이 드네요.
 
능력을 증명해야만하고 치열하게 살아내야 그나마 제자리를 지키는 현실에서, 이런 비효율적인 과정들은 발 디딜 틈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성과를 얻어낼수록 점점 더 잃어만 가는 느낌을 받는 건 왜일까요? 사실 이런 생각에 저는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빠졌던 것 같아요. 생각도, 글을 쓰는 것도, 결정을 내리는데도, 말을 하기까지도 너무나도 느린 나를, 누가, 어느 공간이 기다려주려 할까?
저는 이곳 영화제에 오고부터 비효율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보니, 단숨에 규정내리거나 평가하지 않고도 우리의 관계는 안녕하고, 먼 길을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결코 불안해할 필요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좀 더 비효율적인 사람이 되려고 해요.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과 방식으로 살아나가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