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펼치기) “난 강해질 거야. 나는 혼자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니까.”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9/12/04
아직 길을 좀 헤매기도 하고 사무실까지 올라오는 길은 숨이 차지만 영화제 사무실 공기와 풍경, 사람들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세미나 전에 하는 생활나눔이 그렇게 재미있다던데, 아직 한 번 밖에 해보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다른 곳에서 생활나눔을 할 때는 ‘나는 요즘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를 하고 있다. 너무 재미있다. 좋다. 내년에 영화제에 꼭 와라’ 라고 아직 세미나밖에 안 했으면서 이른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매주 영화를 보고 세미나를 하면서 분노와 답답함이 차오르면서도 이토록 많은 모순과 폭력이 없어지는 세상을 점점 기대하게 되는 이상한 날들입니다.
이번 세미나의 이름은 ‘자본의 톱니-인권의 방법으로 노동 살펴보기’였는데요, 서인영의 운동방법이 와닿는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반도체 하나의 목숨값을 구해라>는 중국의 평화로운 농촌, 누군가의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화려한 불빛이 가득한 도시로 앵글을 옮깁니다. 도시에는 농민의 신분이지만 사실상 도시에서 노동하는 일명 농민공이라고 불리는 노동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값싼 노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농민공임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고 국가에서 이들을 산업 발전의 역군으로 치켜세우는 모습이 한국의 7,80년대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노동자가 사람이 아니라 부속품이 되는 거대한 자본의 구조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그 구조는 언제까지고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무대를 옮겨갈 것이라는 의미이겠지요.
[그림1. T자로 길게 뻗은 책상 주위로 자원활동가들이 모여 앉아있다. 책상 위에는 세미나를 들을 때 필요한 노트북, 아이패드, 간식들이 놓여있고, 맨 앞 스크린에는 '자본의 톱니'라는 제목의 노동권에 대한 파워포인트 자료가 영사되고 있다. 맨 앞 스크린 옆에 서있는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명숙 상임활동가가 양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자원활동가들에게 첫인사를 하고 있다. 자원활동가들은 두 손으로 박수를 치며 환영하고 있다.]
강의를 하러 와주신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명숙님은 왜 ‘노동’하면 임금노동, 노동소득을 떠올리는가, 임금은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자본의 논리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가치로운 일, 할 만한 일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무가치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논리가 위험한 이유는 노동자가 위험한 일을 감수하게 하고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노동자로서 인간의 권리를 자본의 논리로 가리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팍스콘이나 삼성은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금전적 보상만으로 산재 피해자 죽음의 책임을 다하려 합니다.
애플의 최대 납품업체 중국의 전자기업 팍스콘의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팍스콘이 비합리적 요구를 했다면 아무도 팍스콘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일자리가 하나만 나도 세 명이 달려들어요.” 노말헥산에 중독된 노동자들 중 일부는 노말헥산에 노출되어 있던 바로 그 공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기업이 병원에게 로비하여 병원에서 ‘산재’로 진단해 주지 않는 모습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노동자는 독성 물질에 중독되어 걸을 수 없는 경험을 하고도 산재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보상을 받기는커녕 돈을 벌기 위해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고용인은 그러니 우리 기업에 문제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라고 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아무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원청 업체 애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언제까지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영화에는 발암물질인 벤젠과 노말헥산에 중독된 노동자들이 나옵니다. 많을 때는 하루에 700개의 액정을 닦는다는 인터뷰와 함께 밀폐된 공장에서 액정을 닦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반복됩니다. 샤오 야는 노말헥산에 중독되어 치료를 받았습니다. 쿤펑은 벤젠에 중독되어 백혈병에 걸리고 치료를 받던 중 스스로 생을 마쳤습니다. 이 예팅은 벤젠 중독으로 백혈병에 걸려 30번이 넘는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나열은 끝도 없겠지요. 한편 샤오 야는 치료를 받으며 노동자 지원센터에서 화학물질에 중독된 노동자들을 돕습니다. 이 예팅은 레이버 액션 차이나에서 적극적으로 전자산업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활동합니다. 이처럼 영화에서 이들을 무력한 노동자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 고무적이었습니다.
영화 중후반부부터는 전 세계의 전자산업 산재 피해자들이 모여서 포럼을 하고, 벤젠금지협회 공동행동을 하고, 중국 내에서 피해자들이 모여 대책을 세우고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벤젠의 위험성에 대해 알리는 등 운동 성과를 거두려는 듯한 모습이 많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내 나오는 장면은 노동자지원센터의 센터장이 체포되었다는 말과 팍스콘이 산재 피해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모습, 죽은 쿤펑의 아버지의 쓸쓸한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샤오 야는 다시 말합니다. “나는 내가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믿을 거야.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할 거야. 난 강해질 거야. 나는 혼자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니까.” 조용하지만 단단한 샤오 야의 독백에 이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 희망에 고취되려던 찰나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헛웃음이 나오고 멍해졌습니다. 이어지는 자막은 이 예팅이 건강문제로 레이버액션 차이나 활동을 중단했고 노말헥산에 중독된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팍스콘에서 일하던 양단은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저 끝까지 가라앉은 상태로 영화를 마치고 세미나에 다녀왔지요.
세미나에 다녀오고 시간이 좀 흐르니 이것이 영화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답답한 마음에 사무실에 가는 길에 친구에게 전화해 화가 나는 감정과 함께 애플과 팍스콘의 만행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다들 분노하고, 불편하기에 우리가 세미나에서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무언가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반도체 하나의 목숨값을 구하라>라는 영화가 애써 희망으로 영화를 마무리 하지 않고 ‘지금 이런 상황이니까 당신,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라고 눈을 흘기는 것만 같습니다. 내가 쓰는 아이폰도 누군가 독성물질에 중독되면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많이 불편하고 께름칙한 생각이 일상에서 아이폰을 쓰다가도 누군가에게 ‘근데 말이야 내가 영화를 봤는데 팍스콘이 어쩌구, 벤젠이 어쩌구’ 말하게 합니다. 물론 세미나 하며 나눈 이야기처럼 소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보다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구조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싸워야겠지요. 하지만 제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떠드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분노하고, 떠들고. 나아가 소비자로서 벤젠사용에 대해 물으며 큰 바위를 깨부수진 못해도 좀 성가시게 하는 압박을 할 수 있겠지요. 잡스의 말 말고 샤오 야의 말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혼자 싸우는게 아니니까 무기력해 지기 보다는 강해져야겠습니다.
내년 초여름 서울인권영화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찝찝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좀 이상한데 많이 찾아 오셔서 영화보시고 같이 분노하고 함께 강해져서,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부당한 것들을 함께 압박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헤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