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나눠요) 말해의 사계절을 보내며: 기억과 만나는 기록, 기록과 만나는 우리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0/01/02
*[함께 나눠요]에서는 서울인권영화제의 지난 상영작을 함께 나눕니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23회 ‘기억과 만나는 기록'의 상영작 <말해의 사계절>을 나눕니다. 영화가 기록하고 기억한 김말해님은 지난 12월 1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림1. 영화 <말해의 사계절>의 주인공 김말해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며 보라색 크레파스를 들고 스케치북이 가득 차게끔 이름을 적고 있다.]
‘올겨울은 별로 안 춥지 않아?’라고 말하고 나면, 놀랍게도 마치 우리의 말을 엿들은 듯이 매서운 바람이 코와 귀를 꽁꽁 얼게 만드는 하루의 반복입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매주 목요일엔 사무실이 따뜻하게 데워질 수 있도록 많은 자원활동가들이 세미나를 함께 나누는 데요. 지난 12월 12일에는 ‘기억과 만나는 기록’ 섹션에 담겨있는 영화 <말해의 사계절>을 보고 기억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어요.
조금 더 특별하고 많은 감상이 오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세미나에 특별한 초대 손님을 모시기도 했습니다. 바로 서점 ‘달리, 봄’과 사회적기업 ‘허스토리’를 운영하고 계시는 류소연님과 주승리 님입니다. ‘허스토리’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기록하며 세상에 남기는 일을 하는 단체인 만큼 이번 세미나의 주제를 좀 더 잘 풀어내고 자원활동가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미나 전, 발을 동동 구를 만큼 추웠던 날에 가로수길의 한 비건 카페에서 소연 님과 승리 님을 만나 어떻게 우리가 기록, 인권, 그리고 영화를 서로 촘촘히 엮고 느슨하게 풀며 활동가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함께 제가 작년도에 가장 최애로 꼽았던 영화 <말해의 사계절>에 대한 이야기도 실컷 하고 기록에 대한 경험과 생각도 서로 공유하면서 어떻게 세미나를 진행하면 좋을지, 세미나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면 좋을지 정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세미나에선 사전 만남을 바탕으로 우리가 누구를 기록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기록해야 기록자가 진실을 남길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영화 <말해의 사계절>을 바탕으로 더 나아가 영화제가 왜 기록 영화 섹션을 몇 해 동안 편성해왔는지, 여성 인권, 성소수자 인권같이 쪼개진 인권의 한 범주 안에 들지 않는 ‘기억’과 ‘기록’이라는 두 명사가 영화제에서 다른 섹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형태 없는 음성이 기록을 만나 곧 구술이 되고, 무언가로 남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언어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 영화제가 기록 영화를 계속 발굴하고 상영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만 잊으라고, 가만히 있으라는 온갖 말들이 사방에서 비수처럼 꽂힐 때, 그 존재에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는 행위로 연대하는 것이 영화제가 기록 영화를 상영하는 이유 아닐까요?
[그림2. 그림 한 가운데의 전봇대와 도로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푸른 산에 우뚝 솟은 송전탑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김말해 할머니의 집이 보인다. 할머니의 집 왼쪽 외벽에는 태극기가 걸려있다. 김말해 할머니와 할머니의 친구는 함께 땅바닥에 편하게 앉아있다. 김말해 할머니는 신발까지 벗었고,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저는 언제나 할 말이 없다며 손사래치는 사람들, 말하고 싶었던 가슴 속의 응어리를 끝내 삭히려는 사람들이 곧장 바뀌어 금세 마음을 터놓고 말하는 존재가 되는 과정이 좋았습니다. 영화 <말해의 사계절> 또한 주인공 김말해를 한국의 기구한 근현대사와 함께한 국가폭력의 피해자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말하고, 소리치고, 웃고, 울고, 담배를 피우고, 발라당 눕는 김말해를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운 작품이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주름이 자글한 손으로 나물을 다듬는 김말해 할머니를 볼 순 없지만 영원히 그를 기억하고 기록을 더듬어 보는 나는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매서운 바람을 헤치고 저와 함께 그 기억의 끝까지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