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나눠요) "레드헌트"에서 "앨리스 죽이기"까지: 빨간 나라의 우리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0/01/29
*[함께 나눠요]에서는 서울인권영화제의 지난 상영작을 함께 나눕니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18회 서울인권영화제 “이 땅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 상영작 <레드헌트>와 23회 서울인권영화제 “적막을 부수는 소란의 파동" 중 ‘국가의 이름으로' 섹션의 상영작 <앨리스 죽이기>를 나눕니다.
지난 1월 20일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재심이 이뤄졌고,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여순사건은 여수, 순천의 군인들이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파병을 거부하며 시작됐습니다. 파병에 거부한 군인들을 ‘반란군’으로 여기며 진압에 나선 정부는 불과 일주일 남짓한 시간안에 2000~500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만들어내고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된다고 합니다. 여순사건의 피해자들은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 “빨갱이”라는 낙인이 덧붙여지고 이들의 죽음은 이념대립이 발생한 시대의 산물정도로 여겨지며 죽음에 감응하기보단 이러한 죽음을 타당하게 여기는,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이번 울림에서는 여순사건 민간인 피해자의 무죄판결 선고에 깊은 공감을 보내며 반공주의와 국가폭력에 대해 다루는 두 편의 영화를 나누려 합니다. 먼저 18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레드헌트>는 제주 4.3사건을 중심으로 반공주의가 휩쓸고 간 제주의 모습을 반공주의에 입각하지 않으면서 그려냅니다. 미군정과 이승만정부가 어떻게 제주도민들을 '빨갱이'로 구획해나갔는지, 이들을 탄압하는 공권력을 정당화했는지 기록과 자료를 배치하며 사실을 짚어나갑니다. 해방 이전 제주는 보다 자치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의 제주 인민위원회가 있을 정도로 내적 공동체가 단단했지만, 해방 이후 닥친 사회경제적 문제, 미군정의 지배로 인해 4.3 이전부터 제주도민들이 어떤 상황들을 겪었는지 찬찬히 알려줍니다. 특히 1947년 3.1운동 기념식 발포사건 이후 탄압국면으로 치달으며 총파업사태로 이어지고, 총파업이 북한과의 연계에서 일어났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유포되며 극우파들이 제주의 공권력을 다룰 수 있는 위치로 오게 됩니다. 이는 제주 4.3사건에서 빼놓을래야 빼놓을 수 없는, 서북청년단이 제주로 입도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림1 : 영화 <레드헌트>의 한 장면. 제주 4.3사건에 대해 인터뷰하는 노년여성이 “4.3사건. 아이구, 징그러워. 다 숨어서 살고…” 라고 답한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눈꼬리가 축 처진 상태로 말하고 있다. 그의 뒤에는 높이가 낮은 집이 보인다.]
<레드헌트>는 자료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제주 4.3사건의 역사를 더 깊이, 파헤칩니다. 제주 내 '새로운 경찰'들은 알고보니 “왜정” 때의 경찰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학생들이 고문치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제주도민들의 증언으로 샅샅이 그려집니다. 제주도를 둘러싼 공권력의 폭력은 1948년 4월 3일, 무자비한 공권력과 구조적인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납니다. 4월 3일은 단 하루지만, 제주4.3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4월 3일 이후 온건정책을 포기한 미군정의 개입과 방조, 당시 정부 공권력의 모략으로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평화협정이 결렬됩니다. 이후 제주도민들은 5.10 단선을 거부하였고, 미군정의 무차별초토화작전이 펼쳐져 주민들의 도피입산이 이어집니다. 1948년 10월 20일에는 제주도 작전 투입 대기중인 여수순천 연대의 군인들이 이를 거부하며 발생한 여순사건과도 연결됩니다. 제주는 1948년 4월 3일 이후, 이전과는 같을래야 같을 수 없었습니다. 4월 무렵이 되면 하나 건너 하나의 집에 제사가 있는 그런 마을이, 그런 섬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그럴 수 있냐"는 생존자의 말 한마디는 이 사건의 핵심을 그려냅니다. 이념대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명분이 되는 과정은 차마, 눈뜨고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조악하고 잔인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쌓아나간 혐오의 매커니즘이 잘못됐음을 이제는 그래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않을까 싶지만,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덮어집니다. 23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앨리스 죽이기>는 재미교포 신은미씨가 2011년부터 북한에 방문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말하고, 이 내용이 왜곡되는 시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신은미씨는 처음엔 북으로 여행가자는 남편의 제안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10일간의 여행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진 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나누어준 일상을 보고 그들은 '뿔이 달린 괴물'이 아닌 '같은 인간' 임을 알게됐다는 내용을 책으로 담아내고 말로 전했습니다. 하지만 종편방송에서 '북한의 새 지도자를 찬양했다'와 같은 왜곡된 정보들이 보도되며 '종북 아줌마'라는 낙인이 덧씌워집니다.
[그림 2 : 영화<앨리스 죽이기>의 한 장면. 신은미씨는 토크콘서트가 끝난 후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신은미씨 왼편에는 예수상이 놓여져 있다. 신은미씨 맞은편에 기자들이 카메라로 촬영하며 즐비해있고, 맨 앞쪽에는 마이크를 든 기자들이 있다.]
신은미씨는 자신이 북한에 다녀올 수 있었던 이유를 '미국시민권', 특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정치-역사를 톺아봤을 때 미군정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던 통치를 옹호하고,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동경하는 문화가 만연함을 알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미씨의 ‘특권’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그저 ‘종북’으로 낙인 찍히는 모습을 보며 뿌리깊은 반공주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레드콤플렉스(공산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 극단적인 반공주의)는 더 적극적이고 집요하게 신은미씨의 삶으로 침투합니다.'종북'이라는 낙인은 신은미씨와 그의 가족이 맺고있던 인간관계를 끊어내고, 다른 토크쇼에서 '황산테러'라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수준으로 드러납니다. 신은미씨는 경찰로부터 수사가 착수됐다는 전화까지 받고, 당시 대통령인 박근혜의 '종북콘서트'라는 발언으로 인해 '종북'의심은 확정되어버립니다. 이후 강제출국 조치가 내려지고,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감옥에서 석방당한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힘들고 지난한 시간을 보낸 신은미씨는 출국 후 도착한 미국 공항에서 한국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욕과 비난을 마주합니다.
<앨리스 죽이기> 초반부에 신은미씨가 "평생 음악을 해왔기 때문에 음악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길로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모습과 <레드헌트>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에게 이럴 수 있냐'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답지 못한 환경, 소위 '인간대접'을 받지 못할 때 변해가는 환경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주변사람들은 낙인의 그림자조차 무서워하며 떠나가고, 실질적인 생명의 위협을 받고, 실제로 자신의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이 죽어나가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삶. 억울하지만 억울하다고 호소할 수 없는 삶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여순사건의 한 피해자가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 재판부가 공권력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대신 사과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울컥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승리이면서도, 훨훨 털어내고 남은 인생동안 '인간대접' 받을 수 있는 명백한 근거가 손에 잡혔다는 사실이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았습니다. 많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자신의 가족에게 죄가 없단 사실에 확신을 가져도 낙인과 폭력이 파고들고, 이러한 삶이 영화에서 버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두 영화는 60년이 넘는 시대차가 있음에도 반공주의와 혐오의 정치, 국가폭력이 삶을 관통함으로써 삶이 달라진 사람들과, 반공주의가 확실히 자리잡은 한국사회에서 '종북'으로 낙인찍힌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두 영화가 각기 다른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국 반공주의의 시발점인 상황에서 발생한 국가폭력과 반공주의가 고양된 후 나타나는 폭력의 기제가 정말 다르다고 볼 수 있을지, 더 나아가 이념이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레나
*영화 <레드헌트>와 <앨리스 죽이기>는 상영지원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영화를 함께 나누고 싶으신 분들은 서울인권영화제로 연락 주세요. 02-313-2407, hrffseou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