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나눠요) 그대는 우리의 정치적인 몸뚱이를 보라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0/02/12
*[함께 나눠요]에서는 서울인권영화제의 지난 상영작을 함께 나눕니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회 서울인권영화제 “” 상영작 <내 몸은 정치적이다>를 나눕니다.
'살아간다'는 말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삶이 있다. 정치적인 몸을 살아낸다는 것. 분명 몸은 정치가 아니나 증명을 요구받는 몸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몸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술을 마시고, 노동하고, 옷을 입는 일은 몸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의 오만을 노래로, 연극으로, 광장의 외침으로 승화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자신의 몸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름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분노하는 몸의 삶과, 그 몸을 사진으로 남기고 음악으로 표출하는 몸의 삶과, 교육자로서 그런 몸에 대한 ‘논쟁’에 계속해서 싸워갈 것이라 다짐하는 몸의 삶은 결코 분리되어 독해되지 않는다. 23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내 몸은 정치적이다>는 그런 몸과 몸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림1. 영화 <내 몸은 정치적이다>의 스틸컷. 영화의 등장인물 두 명이 무언가를 보며 웃고 있다.]
<내 몸은 정치적이다>를 관통하는 두 단어는 ‘몸’과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몇몇은 주어진 이름을 거부하고, 몇몇은 정치적인 이름을 지키기 위해 공론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의제가 되는 몸을 가지고 있다. 몸에 대한 검열을 반대하는 일과 몸을 검열하는 이들의 눈앞에 한껏 불온해진 몸으로 현신하는 일은 다르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은 증명을 요구받는 몸의 정치성을 인지한 언어로 자신을 명명하는 ‘트랜스젠더’다. 트랜스젠더는 가장 사적인 영역인 ‘몸’으로의 침범에 대응하는 정치적인 이름이다. 생득적으로 경험되는 몸을 굳이 ‘증명’하고, 그 몸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별개의 이름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 나아가 그러한 몸이 겪는 모욕감을 하나하나 전시해야 한다는 것. ‘트랜지션’을 경험한 몸이 구태여 트랜스젠더의 몸이라 불리는 현실은 누군가의 몸을 검열하고 그 몸에 정치를 요구하는 사회의 무례함을 반증한다.
비루했던 올겨울에 부쳐 쓴다. 지난 수 세기간 여성의 몸에 대한 검열과 통제가 존재해왔고, 페미니즘은 여성의 몸을 그 몸에 강제된 정치성으로부터 해방해왔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페미니스트들이 끊임없이 외쳐왔듯, 여성은 자궁과 난소로 환원되는 존재가 아니다. 여성은 몸과 경험되는 몸, 몸의 경험으로 이뤄지는 연속적인 존재다. 그러나 지금, 경험되는 몸이 이뤄내는 삶을 지우고 여성의 몸을 재생산을 위한 성적 기관으로 전락시키는 이들은 누구인가.
숙명여대가 “세상을 바꿀 부드러운 힘”이 될 그녀를 놓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그 처참한 폭력의 과정을 함께 보고, 듣고, 느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검열로부터의 해방에 앞장서온 여대에서마저 몸에 대한 규정과 삶에 대한 검열이라는 폭력의 역사가 반복되는 현실에 비탄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오래된 혐오의 역사를 재생산하고야 마는 가해자들의 아집은 우리를 좌절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의 페미니즘이 여성의 몸을 재생산의 기계와 동일시하는 규정의 폭력으로부터 수많은 여성을 해방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위장하는 혐오와 폭력이 결국은 그들의 목을 옥죄고 말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껏 불온해지자. 우리의 불온함을 검열하는 이들에게 자꾸만 지워지는 몸을 보여주자. 자꾸만 몸에게서 삶을 빼앗는 사회의 우리는 일상을 잡아 뜯긴 몸으로 기꺼이 의제가 될 테니, 여성의 이름으로 혐오를 칭송하는 그대는 우리의 정치적인 몸뚱이를 보라.
당신이 견뎌낸 삶과 당신이 살아낸 일상에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
정치적인 몸을 가진 모두에게 한없는 연대와 지지의 울림을 보낸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권태
*영화 <내 몸은 정치적이다>는 상영지원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영화를 함께 나누고 싶으신 분들은 서울인권영화제로 연락 주세요. 02-313-2407, hrffseou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