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나눠요) 위기 앞에서 위태로운 자는 누구인가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0/03/11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부비며 핸드폰을 드는 습관이 있다. 인터넷 창을 켜고 ‘오늘 날씨’, ‘오늘 미세먼지’를 검색하던 습관은 ‘코로나 확진자 수’를 검색하는 습관으로 바뀌었다. 출퇴근 중, 일을 하던 중, 그리고 주말에 집에서 쉴 때 울리던 긴급알람으로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던 날도 종종 있었다.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가 좀처럼 잦아들지 않자 주변에서는 업무방식, 개인적인 약속 모두 조정하기 시작했고, 사회도 이에 맞춰 대응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개학일을 연기하고, 코로나19로 인해 사업체가 휴•폐업하게 됐을 시 발생한 해고상황과 강제 무급-연차휴가를 써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지침을 알리고, 비정기적인 소득을 벌어들이는 예술노동자들을 위한 지원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등 사람들의 삶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지원을 ‘적절한 조치’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만’ 하기엔, 너무 많은 문제가 터져나왔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어린이집, 학교와 같은 돌봄, 교육시설을 닫자 이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해졌다. 일하던 여성들 중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일과 아이 돌봄 모두를 병행해야하는 상황을 토로하고, 집 밖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당장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다.
요양보호사, 간병노동자들은 노동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마스크조차 제대로 수급 받지 못하고 있다. 마스크 품귀현상으로 하루에 4장 지급하던 마스크가 2장으로 줄더니, 결국 3월 2일부터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돌봄노동자들은 보호자제한, 면회제한 등의 조치로 인해 업무량이 늘어났고, 개인적으로 약국 앞에 줄을 서서 마스크를 구입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는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방역용 마스크를 지급하고 하청 노동자에게는 방한대를 지급하며 노동자건강권에 있어서 차별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사내 하청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휴업수당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다른 회사들은 노동자에게 무급휴가와 연차 사용을 강요하고 있다. 위법임에도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종용한다.
재난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던 공무원 두명이 과로로 사망하고, 한명은 과로로 쓰러졌다. 뉴스 연예란에는 매일같이 연예인들의 기부소식이 줄서지만, 현재 거점병원에서 근무하는 병원노동자들은 식사조차 부실하다. 방호복을 입고 근무하는 의료진들은 탈진과 두통을 호소하고, 인력부족으로 인해 6,7일 근무하는 간호사들도 있다.
일상이 뒤틀리고, 삶 자체를 위협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온다. 서로 물고 물리며 상황은 나빠지고 있다. 이들의 삶이 ‘더’ 나빠진 것은 바이러스로 인한 재난상황 때문이다. 하지만 돌봄과 가사노동이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현실, 처우가 열악하다고 누누히 외쳐온 돌봄노동자들과 비정규직이라는 고용상태가 반쪽짜리 인간으로 취급되는 이들의 노동조건은 재난 이전에도 존재했다. 위급하고 긴급한 상황이 아니어도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 모든 일이 끊겨 생계를 꾸릴 수단이 사라진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재난은 그저 평등하지 않은 현실을 가감없이 드러냈을 뿐, 삶이 위태롭고 버거웠던 사람들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림1. 영화 <노동의 심장>의 스틸컷. 자논공장의 노동자들이 회의시간에 투표 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다. 컨테이너 박스로 된 공장에는 노동자들의 얼굴이 빼곡히 들어서있다. 노동자들 사이로 천장에 붙은 쇠사슬이 아래로 길게 내려와 늘어져있다.]
14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노동의 심장>에서는 2001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당시, 제논 타일 공장이 노동자들에게 임금지급을 멈추고 긴급폐쇄한 이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제논공장의 노동자들은 공장 폐쇄로 이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갈 수 없게 됐다. 일자리가 없어지고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삶은, ‘살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려고 사는 삶’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장이 버린 공장을 점거하고, 가동하는 투쟁을 벌였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기 전에는 물량을 유지해야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다. 기계가 멈추거나 실수가 발생하면 물량공급에 지장이 생기기에, 공장노동자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 받으며 긴장을 온몸으로 체화해나갔다. 공장이 쉴 새 없이 가동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노동자들은 기계를 끊임없이 고쳐야했다. 그러한 공장은 사람이 아닌 생산과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3일에 1명 꼴로 사고를 당했고 매년 최소 1명씩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책임져야 하는 가족과 자신의 삶을 유지 하기 위해선, 공장을 원활하게 가동시켜야했다. 자신을 갈아넣던 노동자들은 같은 처지임에도 화장실에 빨리 다녀오라고 하거나 쉬지 말자는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청력손상을 막기 위해 귀마개를 껴야하는, 기계음이 가득한 공장에서 ‘안전’은 ‘나중’이었고, 휴식과 쉼은 사치였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지키고 운영해나가며 자본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노동이 지속됐다면, 그들의 노동이 존중받기 어려웠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자들은 동료가 죽어가고, 그 자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지고, 또 다시 동료가 죽는데도 문제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침묵으로 가득찬 세계’를 부숴야 했다. 그리하여 주간에는 공장을 가동했고, 야간에는 불침번을 세워가며 공장을 완전히 폐쇄하기 위해 동원된 경찰의 진압에 맞섰다.
모두가 평등하고 동등한 임금을 받으며 모두를 다르게 대우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과 회의를 열었다. 자논공장의 노동자 모두가 공장운영에 개입할 수 있었으며, 관료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을 지양했고, 운영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노동자들에게 공유됐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동료들과 함께 정한 목표값에 맞게끔, 자신의 역량에 맞게끔 일을 조절하며 일을 해나가던 공장노동자들의 삶은 이전과 같았다. ‘인간은 진정한 노동으로 존엄성을 느끼’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존엄한 노동자로 인지해나갈 수 있었다. 공장 밖에서는 투쟁의 파동이 넘실댔고, 공장 내부는 존엄하게 살고자 자기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들로 인해 한껏 ‘시끄러워’ 졌다.
지난 1월 31일 고용노동부는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 특별연장근로요건을 완화하며 ‘재난, 재해 시 뿐만 아니라 시설이나 설비 고장 등의 상황, 평소와 달리 업무량이 급증하고 재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심각한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에도 특별연장근로를 신청할 수 있게끔 허용’했다. 정부는 시민들이 사용할 마스크가 부족해지자 공장노동자들의 노동시간 규제를 완화했다. 마스크 수급이 가능해졌고, 공장노동자들의 노고로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력에 기대는 건 재해, 재난과 같은 ‘특수’한 상황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합법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사측이 원할 때 과도한 노동을 할 수 있게 됐다.
확진자들의 동선이 공개될 때 마다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자들을 치켜세운다. 하지만 자기관리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집단 생활을 하며 일할 수 밖에 없는, 이동이 잦은 업무를 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바이러스 전파자’로 취급받는다. 9일 60여 명의 확진자가 발생한 곳은 콜센터였다. 1m도 안되는 거리마다 책상이 놓여있고, 200여 명이 함께 근무하는 콜센터 노동자들은 마스크를 쓰면 고객들이 잘 안들린다고 컴플레인을 걸기에 마스크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점심에 함께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휴식시간이 짧아 모두 점심을 싸와서 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지만 나에게 통제권, 결정권이 없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끔 만든다면, 스스로 그 노동을 존중하기 어렵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존중받지 못한채 일하는 사람들은 결국 ‘원래 저런 일’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원래 저런 일, 이란 이름으로 차별과 혐오가 발생하고, 차별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어 다시금 노동자들을 옭아맨다.
전국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 수가 줄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확진자 0명, 코로나바이러스 해결, 백신 개발’과 같은 희망찬 메세지가 들려오길 바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사태가 ‘무사히’ 끝났다고 쉬이 여겨질까 우려된다.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자리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국가위기상황의 희생정신’으로 납작하게 칭송해버리면, 본질적인 문제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존엄한 인간의 노동은 존엄하지 않다고 여겨지고 있다.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하고, 계급이 나뉘어진 사회에서 재난조차 이들에게 평등하지 않았다. 사태가 정녕 ‘진정’되기 위해, ‘사람이 먼저’이기 위해선 우리가 누굴 발딛고 서있는지, 누가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지 알아야한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