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 8호](자원활동가 편지) 지금까지 인권을 글로 배웠습니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5/05/15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지붕 뚫고 하이킥> 에피소드 중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현경(오현경 역)이 남편인 보석(정보석 역)에게 모처럼 적극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는 내용입니다. 평소 남편에게 좀 무뚝뚝했던 현경은 자기가 알고 있는 연애 지식을 총동원해 남편에게 애정표현을 하려는데, 아뿔싸, 막상 자기가 알고 있는 걸 해 보니 너무 어색합니다. 온갖 달콤한 말도 어색하고, 키스도 어색합니다. 그제야 현경은 깨닫습니다. ‘전 연애를 글로 배웠습니다. 키스도 글로 배웠습니다’라고요. 고백합니다. 저도 현경과 같았습니다. 인권에 대해 나름 썰(?)을 풀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신문과 잡지, 책 등에서 인권 관련 글을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는 ‘글로 배운 인권’이었습니다. 이렇게 글로 배운 인권으로 인권에 대해 아는 척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과연 인권에 대해 정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라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을 해 보기로 한 건 그런 이유였습니다.
솔직히 처음 인권영화를 접했을 땐 한편으론 낯설었고, 한편으론 불편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접한 인권 관련 글들은 거의 정제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권영화 중 상당수는 당사자의 목소리가 날것 그대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 투쟁 장면, 실제 당사자와 활동가들이 한 말, 지극히 당사자·활동가 중심적인 시선들…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오니 처음엔 정신이 없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속으로 왜 이 부분을 이렇게 재미없게 나타냈지? 이 부분은 좀 수위를 낮춰서 말하는 게 더 효과가 좋지 않나? 등 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제 ‘글로 배운 인권’의 한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세미나에 몇 차례 참석했고, 영화도 제법 봤습니다. 실제 활동하는 분들의 생각을 직접 듣고, 영상을 통해 당사자와 활동가의 입장을 계속 살펴봤습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살피다 보니 퍼뜩 느껴지는 게 있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얼마나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나보단, 얼마나 당사자의 목소리가 사회에 제대로 전달되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바라보는 냉혹한 시선에서 알 수 있듯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는 때로 심각하게 왜곡됩니다. 이는 이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잘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수록 필요한 건 정말 당사자/활동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생하게 살펴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이 공권력 혹은 사회의 편견 어린 시선에 의해 어떤 고통을 겪고 고민을 하는지, 이들이 왜 물러서지 않고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지…그런 것들을 영화를 통해, 그리고 정기적인 회의를 통해 보다 잘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사안을 ‘아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누구든지 알 수는 있지만, 이를 자세히 살피고 듣고 공감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느꼈던 낯섦과 불편함은 이내 좀 더 굳건한 생각으로 변했습니다. 인권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보다 커져야 하는 당위적인 이유가 있음을요. 그리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정말로 전 지금껏 인권을 글로 배워 왔던 게 맞단 것을요.
그렇게 이것저것 배우다 보니 어느덧 서울인권영화제 당일이 되었습니다.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권의 여러 조각들이 보다 생생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번 영화제에선 정말 다양한 사안들이 스크린을 통해 나타납니다. 조각들은 다양하지만, 그 어떤 것이든 모두가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공감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인권영화제가 그런 관심과 공감의 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이곳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자원활동가로서 간절히 가져 봅니다.
요즘 혐오와 편견, 극단의 시선들이 사회 곳곳을 할큅니다. 무차별적인 시선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상처를 주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당사자의 시선이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그 시선들을 우리 모두가 기억, 했으면 합니다.
선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