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활동가 편지) 영화제가 끝날 무렵엔 어떨까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7/01/25
체는 종종 혼자 걷는다. 혼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걷는다.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다 맞는다. 그러면서 체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가능한 조용히 혼자 죽어야지. 지구상에 내가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지. 아무에게도 들통나지 않아야지. 그렇게 죽어야지.
나는 때때로 체와 함께 걷는다. 다분히 성큼성큼 오랜 시간 함께 걷는다. 그러면서 나는 체를 생각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모든 사람은 자기 몸에 적당히 맞는 죽음을 입는다고 했다. 품이 널널하든 답답하든 대충 팔이 들어가고 얼렁뚱땅 단추가 잠기면 죽음을 입는다. 체가 혼자 걸을 때마다 나는 릴케를 생각했고, 품이 너른 조끼와 품이 답답한 조끼 두 벌을 번갈아 떠올렸고, 그리고 단추를 여미는 나를 상상했다. 조끼를 입지 않은 맨살을 그리기 어려웠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무언가 입을 게 필요했다.
죽은 길고양이는 어디에 있을까. 죽은 비둘기는. 조끼를 입고 구색을 갖춰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끼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사전모임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조용히 혼자 죽는 생을 더듬어 본다. 하나의 얼굴을 평생 뒤집어쓰고 살다가 아무 흔적 없이 몰래 죽는 생을. 체를, 나를.
나는 오늘 행복했구나 싶은 날이 있다. 나는 오늘 잔인했구나 싶은 날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날들의 끝에 나는 혼자 걷고 있을 체를 생각한다. 내가 행복한 만큼 잔인했던 날의 끝. 어디선가 체는 얼굴 없이 조끼 없이 죽을 맘을 먹는다. 그 헤아려지지 않는 어디께를 헤아리려다 보면 나는 나의 얼굴자리가 무섭다. 조끼 없는 맨살이 무섭고. 영화제가 끝날 무렵엔 어떨까.
- 자원활동가 은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