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눠요)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7/02/22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
(↑ 20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영화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문득 우리 동네에는 저상버스를 몇 대나 운행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두 시간 동안 정류장을 지나가는 버스 중 저상버스가 몇 대나 있는지 세어보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설 연휴가 되어 아들의 집으로 놀러 갔던 박소엽 할머니께서 수직형 리프트 추락사고로 돌아가시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는 ‘장애인 이동권’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부와 서울지하철은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립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2003년 5월 지하철 1호선 송내역 승강장에서 시각 장애인이 추락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뒤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동권 연대)는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선로를 점거했습니다. 목숨을 건 점거였습니다.
2004년 12월 29일 이동권 조항과 저상버스 도입의 의무화가 명시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여전히 장애인의 이동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속버스를, 광역버스를 타야 할 때 장애인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굳이 고속버스를 타야 하냐고요? 욕심을 부린다고요? 이만하면 됐고 나중에 얘기해 보자고요? 우리는 충분하다고 말하는 대신 부족한 게 무엇인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했을 당시를 회고하면서 시작됩니다. ‘피난 하라는 알림이 왔을 때 사토 씨는 활동 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집 뒤쪽으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집채만 하다는 표현은 부족했습니다. 사토 씨는 “포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지진, 쓰나미, 그리고 핵발전소 폭발로 인한 피해에서 장애인의 사망률은 2%였습니다. 비장애인 사망률의 두 배에 달하는 숫자였지요.
원전피해지역에 남기로 결정한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내 존재가 남에게 민폐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 대피소로 갈 수가 없었다고요. 대피소는 장애인을 수용할 수 있는 설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고 활동보조인이 없이는 집 앞 산책을 가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국가에게 이들은 장애수첩을 가진 수치 그래프일 뿐이었습니다.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었죠. 화장실에 안전봉을 달아 놓으면 그만이고 휠체어가 들어갈 공간을 생각하거나, 현관에 계단 대신 경사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력 밖의 일이었으니까요.
죽음 앞에서 인간은 공평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런가 싶습니다. 쓰나미가 몰려올 때 피난할 수 있었던 사람과 그럴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동할 수 있었던 사람과 그럴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던 사람과 그럴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고요. 그 차이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제 충분하다고 말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목숨을 내놓고 광화문역 선로를 점거했던 이들의 투쟁은 역사 내 엘리베이터 설치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역사 엘리베이터는 장애인 뿐 아니라 노약자, 임산부, 갈 길이 바쁜 이들에게 유용하게 이용됩니다. 장애인 이동권은 비단 장애인에게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 전반에 해당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장애인 이동권은 장애인을 활동보조인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존재로부터, ‘포기’하게 하는 존재로부터 그 이상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던져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이상을 상상해야 합니다. 그 어떤 문제도 당사자만의 몫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은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