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눠요) 여기에는 N명의 ‘평범한’ 마리아나가 있습니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7/03/08
여기에는 N명의 ‘평범한’ 마리아나가 있습니다.
3월 4일 토요일, 청계광장에서는 ‘페미답게 쭉쭉간다’는 이름의 페미니즘 문화 행사가 열렸습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개최된 이 행사는 언니네트워크, 전국디바협회, 장애여성공감 등 12개의 단체가 부스를 마련하였고 래퍼 슬릭의 공연과 각 연대체의 발언까지 알차게 준비된 행사였는데요.
그 중에는 자신이 겪은 여성혐오 상황이나 발언을 송판에 적고 격파하는 ‘뿌셔뿌셔 혐오뿌셔’와 ‘나는 어떠어떠한 대통령을 원한다’는 손 팻말 문구를 채우는 이벤트, ‘브라 보관소’, 그리고 비건 콘돔과 피임사전을 판매하는 ‘성과 재생산’ 부스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부스를 구경하고, 스티커를 받고, 발언을 듣고, 함께 노래하고 행진하면서 한 마디로 정리하기 힘든 여러 복잡하고도 격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 '페미답게 쭉쭉간다' 행사 현장과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풍선)
생리대가 참 비싸다! 라고 구호를 외칠 때 시스젠더 여성인 누구의 맥락에서의 생리와 MTF 누구의 맥락에서의 생리가 다르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장애 여성 누구의 맥락에서의 생리와 청소년인 누구의 맥락에서의 생리가 또 다르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맥락들이 닿고 흩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입체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또 한편으로 이 모습이 단면적으로만 취급되는 어떤 상황들에 가슴 아프기도 했습니다.
(↑ '페미답게 쭉쭉간다' 행사에 참여한 많은 단체들의 깃발)
작년 21회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했던 <내 이름은 마리아나>는 지정성별 남성으로 태어나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던 마리아나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아내에게 회사에 잘 다녀오라는 배웅을 받고 집을 나선 그가 돌연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고백합니다. 지금 내 모습이 너무나 역겹게 느껴진다고요. 그 날을 기점으로 해서 마리아나는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부모님에게, 직장 동료에게 애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마리아나의 어머니는 내 아들처럼 ‘평범하게’ 말해 보라고 합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변에서 살자. 거기에서는 당신이 입고 싶은 것을 다 입을 수 있어.’ 아이들은 여자가 된 아버지를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나 자신은, 샤워 후 자신의 몸을 똑바로 들여다보기가 힘듭니다.
평범하게 말해 봐. 해변에서 살면 되잖아. 당신이 뭘 입든 상관하지 않는 곳에서. 왜 굳이 여자가 되려고 해? 여자는 사회적 약자야. 차별을 받을 텐데. ‘진짜’ 여자가 되지도 못할 걸. 생리도 안 하잖아?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은 MTF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MTF는 여자라고 할 수 없지. 제3의 성은 없어.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을 뿐이야. 당신은 조롱거리가 될 거야. 봐, 쓰다 버린 립스틱을 선물이랍시고 받아왔어?
(↑ 21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내 이름은 마리아나' 스틸컷)
<내 이름은 마리아나>에서의 대사 토막과, 청계광장 발언대에서 쏟아져 나왔던 혐오발언 토막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습니다. 여성으로서의 인권과 성소수자로서의 인권이 둘로 나뉠 수 있느냐는 질문이 그 사이사이를 날카롭게 찌르고 다녔습니다. 내가 무엇인지를 단 하나의 맥락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첫 마디만 듣고 아~ 그거? 라고 대꾸하고 있는 것 같았지요.
1908년 3월 8일, 만 5천여 명의 여성들이 러트거스 광장에 모였습니다. 10시간 노동제와 작업환경 개선, 참정권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의 국제적인 연대 운동이 시작되었고 3월 8일은 현재까지 세계 여성의 날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1985년부터 매년 3월 8일을 기념하며 행사를 합니다. 여성 노동자에게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고, 연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으로 취급되며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를 떠받치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여자 흉내를 내지 말고 평범하게 말하라고 요구받을 때, 생리대 값이 비싸다는 둥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를 정치적 발언대에 끌어오지 말 것을 요구받을 때 그것을 판단하는 이는 누구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고 평범과 비범을 구분하는 이가 누구인지.
3월 4일 토요일 청계광장에는 N명의 마리아나가 모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설명하고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어느 지점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안아주고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노래하고 춤추었고 브라를 벗어던졌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마리아나들이었습니다.
* 21회 상영작 <내 이름은 마리아나>는 서울인권영화제에서 7월 27일까지 상영지원 받으실 수 있습니다. http://hrffseoul.org/ko/screening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은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