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눠요)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대표합니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7/03/22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대표합니다
#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5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습니다. 전투경찰은 무장을 하고 서서 해산할 것을 명령합니다. 시민들의 손에는 해바라기가 한 송이씩 쥐어져 있습니다. 협정 철회와 민주주의 수호를 연호하는 50만의 목소리가 거리를 꽝꽝 채웁니다. 몇 차례 경고 끝에 전투경찰 대오에서 시작된 물대포가 시민 대열에 직사됩니다. 경찰들은 방패와 곤봉을 사용해 집회 참가자들을 쓰러뜨리고 끌어냅니다. 카메라는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는 시민들과 분수대 물줄기 사이를 뛰노는 아이들을 번갈아 보여줍니다.
21회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했던 <국회를 점거하라>의 한 장면입니다. 2014년 3월, 대만 국민당은 중국과의 서비스업 상호 개방을 골자로 하는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을 체결하려 했습니다. 이 협정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율이 높은 대만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점, 그리고 제대로 된 조사와 심사, 실질적인 감독이 없이 졸속으로 통과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3월 18일 시작된 해바라기학생운동 역시 협정을 재심사해야 한다는 움직임이었지요.
오랜 세월 계엄체제와 경기침체를 겪으며 국가의 여러 정책 결정 사항에 대해서 토 달지 않으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정부의 이 같은 결정에 분노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여기 있다! 떠나지 않는다!’고 외쳤습니다.
(↑<국회를 점거하라> 스틸컷)
# 나는 정말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국회를 점거하고 마이크를 잡았던 이들 중 특별히 주목받았던 몇 명의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발언권이 집중되고 언론의 관심이 쏠리자 중요 사안 여부에 따라 대변인을 내세우는 등의 ‘정치적’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누가 마이크를 잡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이크 잡은 이를 감시하는 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해바라기학생운동에 참여한 모두가, 특히 마이크를 잡았던 일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요.
2014년 3월이 대만 역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였듯이 2017년 3월 또한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한 장이었습니다. 20차 촛불집회를 하루 앞둔 10일 금요일이었는데요.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청구를 인용합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고 박근혜 게이트(최순실 게이트로 이야기되는)에 연루된 주요 피의자들의 수사가 본격화되겠죠.
박근혜 정부의 실체를 드러내고, 비선실세를 들춰내고 대기업 총수를 구속, 대통령을 탄핵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100만의 촛불이 있었습니다. 2016년 10월 29일 3만 명으로 시작한 촛불집회 참가자는 5차 집회에 이르러 230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이후로도 100만 명을 웃돌며 2016년의 혹독한 겨울을 거리에서 보내는데요. 저에게도 그 겨울은 거리와 촛불, 그리고 지하철 1호선 막차를 꽉 채운 시민들로 기억됩니다.
이쯤에서 저의 첫 집회를 떠올려보고 싶은데요. 학생회관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하던 친구가 점심을 먹는 동안 대신 피켓을 들고 서 있었던 것도 집회로 치자면 말이죠. 피켓에는 허가받지 않은 무언가를 지정된 게시판이 아닌 다른 곳에 붙여 교내 미관을 해쳤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어떤 학우를 위한 응원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어쨌건 교칙을 위반한 건 잘못 아니야? 라고 물었고, 점심 먹고 와 대신 들고 있을게. 라고도 말했습니다.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내 일도 아닌데 왜 나섰을까 하고 후회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기는 할까 하는 의심도 생겼죠. 그런데 이상합니다. 문득 어떤 노래가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콧노래로 흥얼흥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던 학우들이 하나 둘 멈춰 서기 시작했습니다.
(↑20차 촛불집회)
#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대표합니다.
20여 차례에 걸친 토요 촛불집회는 다양한 콘텐츠를 수용했습니다.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칠 뿐 아니라 노래하고 춤추기도 했습니다. 촛불과 피켓을 들었고 온 몸에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누군가는 집회문화의 변질이라고 말했습니다. 춤추고 노래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비판하기도 했죠.
그러나 점거하고 방해하는 정치적 행동은 방점을 저기가 아닌 여기에 찍는 몸짓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삭제된 곳에 무언가를 적어 넣는 움직임일 수도 있습니다. 2014년 대만에서, 2016년 겨울 한국에서 정부와 기업에 의해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던 것처럼 말이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국회를 점거하라>를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상을 구하는 수고로움을 덜자면 서울인권영화제에 문의를 주시는 방법도 있을겁니다. 어떤 장면에선가 나 자신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가 튀어 나올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대포와 물대포를 맞는 시민과 분수대와 아이들 그리고 땡볕 아래서 피켓을 대신 들고 서 있던 나. 라는 식으로요.
더불어 우리는 우리가 세운 대표를 직접 끌어내렸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대표한다는 사실을 공언한 셈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수사하고 적폐를 청산하라는 구호를 바탕으로 21차 촛불집회가 열린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대선도 5월 9일로 7개월 앞당겨졌죠. 다음으로 마이크를 쥘 이는 누구인지 잘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 21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국회를 점거하라>는 상영지원 문의를 통해 각 공동체에서 상영하실 수 있습니다. 문의방법: http://hrffseoul.org/ko/screening
- <국회를 점거하라>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궁금하시다면: http://hrffseoul.org/ko/film/1927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은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