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활동가 편지) 안녕, 나야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8/02/27
안녕, 나야.
어느새 유난히도 춥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어.
알잖아. 나는 봄을 정말 좋아하는 거. 햇살이 부서지고 따뜻한 바람이 불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해.
그런 나에게 있어서, 봄을 기다리는 지금 이 순간이란, 앞으로 날씨가 더욱더 따뜻해지고 해가 더 길어지고 꽃들이 더 활짝 필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해.
있잖아, 나는 종종 시간이 가지 않기를 바라. 오늘이 지나가는 게 싫어서, 오늘을 꽉 잡고 있고 싶어. 그래서 불면증에 시달려. 내가 잠들지 않으면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비록 자정이 넘을지라도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시기만 되면 시간이 빨리 가면 좋겠어. 봄이 오잖아.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고, 해가 길어지고 있고, 꽃이 필 예정이잖아. 눈 한 번 깜빡이면 내 생일이 오고, 두 번 깜빡이면 개나리가 피고. 세 번 깜빡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네 번 깜빡이면 벚꽃이, 다섯 번 깜빡이면 라일락이 피었으면 좋겠어.
아, 나는 유난히도 추위를 많이 타. 물론 서울보다 더 추운 곳에 살면서 추위를 견디는 것엔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추워. 또 나는 겨울만 되면 항상 아프고 북향인 내 방은 겨울을 나기에는 너무 추워. 그래서 나는 겨울이 힘들어.
겨울과 친해지고 싶어서 ‘겨울만을 위한 아이템’을 마련하기도 해. 겨울의 찬 공기와 어우러지면 기분 좋은 상쾌함이 느껴지는 녹차 향 향수 같은 것 말이야. 올겨울엔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코트를 샀어. 겨울이랑 더 친해지려고.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올겨울 난 여전히 힘들었어. 많이 추웠고, 주사를 맞았어.
그래도 겨울은 지나가고 있어. 곧 봄이야. 나는 언제부터인가 다시 하루가 빨리 가길 기다리고 있어. 설이 지났고, 내 생일이 다가오고 있어. 다음다음 주 정도 되면 할머니가 새벽기도 가는 길에 찍으신 꽃 사진을 보내주시겠지?
“꽃이 예쁘게 피려고 하네~ 아프진 않고? 할머니가 준 영양제는 다 먹었니? 밥이나 먹자 언제 시간 되니?” 이렇게 말이야.
할머니를 만날 때 즈음이면 철쭉이 피겠지? 아홉 살 때는 따서 머리에 꽂았지만, 이제는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나이니까 그러지 않을래.
너는 잘 지내고 있니?
나는 말이야, 꽤 괜찮게 지내고 있어. 내가 안전하다 느끼는 곳을 찾았고, 그곳에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작년 봄의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에서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어. 아마 너도 놀랄 거야. 내가 인권영화제를 하다니. 내 이야기를 하다니. 글을 다시 쓰다니.
내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내가 기다리는 봄은 다시 오고 있어. 너에게도 봄이 오길 바라. 지금 이 순간이 누군가에겐 끔찍하게 싫은 시기이고, 누군가에겐 그저 그런 지나가는 나날 중 하나겠지. 그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너에게만은 힘들었던 겨울을 뒤로하고 내일이 기다려지는 그런 순간이길 바라.
너도 잘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지내길 바라.
앞으로도 자주 보자 우리.
고마워.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