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활동가 편지) 이런 나로, 조금 더 오래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8/05/23
편지를 쓰려고 하니
조금 과장되더라도 멋진 말들을 찾아서 당신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싶어
머릿속으로 문장을 썼다 지우길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동안 편지를 쓸 때마다
감상에 젖어서 과장된 표현을 쓰길 즐겼습니다.
편지란 그렇게 나를 들뜨게 만드는 일입니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이 편지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담백하고 진솔한 편지가
나를 그러고 싶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편지들을 읽었습니다.
최근의 것부터 1년 전 것까지.
꼼꼼히 읽지 않았는데도 당신 편지의 여운이 나를 울렸습니다.
나는 현실에서 만나는 당신을 곱씹었습니다.
당신의 말들을 곱씹었습니다.
당신의 말을 만든 시간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당신과 맺은 관계의 깊이와 무관하게
편지로 만난 당신은
새롭고. 낯설고.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무어라 대답하게 될까요?
내게는 조급함이 가장 먼저 찾아올 것 같습니다.
어떤 말로 나를 비루해 보이지 않게 표현할까, 하며
머리를 굴릴 것 같습니다.
아직 받지 않은 질문이지만
혹시나 이런 질문을 받아서
역시나 그런 마음이 들면, 당신을 곱씹어보려 합니다.
당신이 했던 말들의 무게를 곱씹을 것입니다.
당신 앞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하고
나에게 물을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당신을 만나면서 내가 선택해온 말들의 많은 것들이
적당한 타협을 위한 뒷걸음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경험 속에서 말은 '오해'의 씨앗이요, '상처'의 불씨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말을 하는 대신
상대방이 좋아할 말, 상대방에게 불편하지 않을 말들을 찾아 왔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내 삶마저 타협했습니다.
적당히
남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도록
삶의 정면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습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아니, 바뀌고 싶어서 당신을 만날 결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단단한 다리로 이 땅을 딛고 서도록.
권위 있는 이들의 눈빛에 움츠러들지 않을 만큼.
대세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좋은' 가치들로 나를 치장하는 일을
멈출 때까지.
나는 아직 당신이 조심스럽습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그곳에 있어도 되는가? 자문합니다.
아직도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나로,
조금 더 오래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