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펼치기) 절망이랑 싸워온 우리는 이제 분노로 싸울 거야

(활동펼치기) 절망이랑 싸워온 우리는 이제 분노로 싸울 거야

안녕하세요.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지윤입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왔어요. TV에서는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심야토론이 방영되고 있었고, 그걸 틀어둔 거실의 공기에 숨이 막혔습니다. 당신은 알까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행진하는 저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여름의 시청 광장을 뒤덮은 무지개 깃발이 매년 나를 견디게 한다는 것을. TV 화면을 채운 혐오발언이 나의 숨을 막히게 하고 있다는 것을. TV를 틀어놓고도 남 이야기 보듯이 가만히, 그리고 태연히 있는 당신을 보며 나는 방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방에 누워 거실의 TV 소리를 외면하고, 지난 10월 20일 세 시간의 걸음을, 목이 쉬라 외치던 구호들을 떠올리고 나서야 무력감을 뒤로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좌절의 경험을 모아, 분노의 외침으로 토해냈던 그 날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0월 20일 토요일은 차별금지법 제정촉구 평등행진 <우리가 간다>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사전대회였던 난민환영문화제가 끝난 세종로 공원은 이미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오랜만에 햇볕이 세게 내리쬐기도 했지만, 그보다 뜨거운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평등을 외치는 울림, 차별금지법 제정을 이루어내겠다는 간절한 바람 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각자의 절망들은 모여 분노가 되었습니다.

 

 

 

[그림1 :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들이 서울인권영화제 깃발을 들고 마포대교 위를 행진하고 있다. 여러 단체의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고, 평등행진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율동을 하며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광화문에서 국회까지 이렇게 걸어볼 일이 또 있을까요. 서울인권영화제 깃발 아래에서 영화제 활동가들과 함께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걷는 내내 먹먹함인지 막막함인지 모를 감정이 들었습니다. ‘여의도까지 세 시간을 걸을 기력이 나에게 있을까?’, ‘이 행진을 마치면 정말 차별금지법이 제정될까?’ 평소였다면 언덕이 이어지는 이 길을 세 시간이나 쉼 없이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건 ‘힘든 날 좀 봐달라’는 호소가 아니라, ‘내가 겪는 차별에 정부는 책임을 다하라’는 분노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앞을 향해 가다가 옆을 돌아보면 혐오 발언이 담긴 피켓들이 우리를 향했습니다. 혐오세력들은 지치지 않고 공허한 외침을 뱉어댔지만, 우리는 지칠 수 없는 분노의 외침을 뱉어냈습니다.

 

 

[그림2 : 평등행진 참가자들이 국회 앞에 다다라, 국회를 향하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마포대교를 건널 때는 세상의 끝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여섯 색깔의 손 펼침막을 들고, 그걸 펼치며 파도를 타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다리를 넘으면 정말로 차별이 없는 다른 세상에 다다르길 바라면서요. 국회 앞에 모였지만 국회는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일렬로 늘어선 경찰들과 굳게 닫힌 국회의 문, 외면하는 자들이 막고 있는 벽의 견고함. 넘어야 할 게 너무 많지만, 넘을 수 있다는 힘이 차올랐습니다. 천 명이 넘는 시민들이 분노와 눈물로 외치는 이 이야기가 거기에 닿기를 바라기에, ‘지금 당장’이 아니면 안 되는 우리들은 여기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림3 :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정리집회 <평등으로 빛나라> 무대 위에서 비혼여성코러스 아는언니들, 게이합창단 지보이스,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정리집회 <평등으로 빛나라>에서는 활동가들의 발언과 공연이 이어졌고, 성적소수자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영상을 감상했습니다. 해가 지고 차가운 바닥만이 남아있었지만, 그걸 이겨낼 어떤 힘이 있다는 건 분명했습니다. 무지개 불꽃 퍼포먼스와 함께, 이날의 집회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견딤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리고, 언제까지 나중이어야 할까요. 정부는 언제까지 차별을, 폭력을 방치할 것인가요. 기다림은 지치게 하고, 기대는 늘 절망이 되고, 이 국가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끊어내고 싶습니다. 일상적으로 부정당하는 경험이 나를 무너뜨리거나 고립시키려 해도, 버텨낼 수 있던 건 우리가 모여 차별금지법 제정을 이뤄내고 말겠다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입니다. 이제는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넘어, ‘여기에 자리하게 된 나를, 여기에 있는 나를, 여기에 여전히 있고자 하는 나를 좀 보호하라’는 외침에 답할 때입니다.

 

절망과 싸우고 버텨온 우리는 이제 분노로 싸우려 합니다. 지금 당장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이 움직임과 함께,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는 단호한 외침과 함께요.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