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펼치기) 우리는 이곳에, 늘 여기에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8/10/31
2018년 10월 13일, 태풍으로 인해 한 주 연기된 부산퀴어문화축제에 서울인권영화제 역시 참여했습니다. 일정이 급하게 변경된 탓에 사람들이 많이 없는 것은 아닐까,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광장 바로 옆에서 혐오세력 측의 ‘레알 러브 축제‘가 진행된다는데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등등 걱정을 한아름 안고 해운대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도착한 해운대는 경찰들이 줄을 지어 광장 펜스를 지키고 있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것 없이 잔잔했습니다. 부스에 도착해서 서울에서부터 싸들고 온 후원물품들을 전시하고, 핑크워싱 안내판과 동영상을 재생하고 참가자들을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걱정이 무색하게 광장이 꽉 채워졌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 부산퀴어문화축제를 기다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는 건지, 참가했던 퀴어문화축제 중 가장 날씨가 좋았어요! 서울퀴어문화축제 부스에서도 봤는데 부산에서 다시 보니 반갑다며 다가와 주셨던 분들도 계셨고, 내년 영화제 참여를 약속하며 리플렛을 받아가신 분들도 많았어요.
[그림1 : 부산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서울인권영화제 부스. “퀴어들의 천국은 없다: No to Pinkwashing l 서울인권영화제”라고 적힌 부스 소개가 있다]
한참을 서서 부스 안내를 하다 보니까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서, 광장을 걸어 내려와 경찰이 열어둔 문으로 나와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햄버거 매장의 화장실로 갔습니다. 개방된 화장실이 그곳밖에 없어서였는지, 누가 봐도 퀴어문화축제 참가자인 사람과 혐오세력 집회 참가자인 사람이 섞여서 줄을 서 있었습니다. 화장실 밖으로 나가면 저 사람도 저 피켓을 들고 부끄러운 줄 모르며 소리를 지를까,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망설임 없이 여자화장실 앞에 줄을 설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와 광장을 둘러싼 펜스 바깥의 도로를 걸어 올라오며, 왜 우리는 이 펜스 안에서만 안전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펜스를 경계로 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과 나오는 사람,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펜스 없이 섞여 있을 수는 없는 걸까, 의문이 들었던 찰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꽁꽁 싸맨 누군가가 제 옆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얼핏 그 분의 뒷모습을 보며, 마지막 의문에 대해 여전히 만족할 수는 없는 답을 스스로 주었습니다. 적어도 기꺼이 펜스 안으로 들어오려는, 혹은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란 최소한의 안전 장치가 필요할 수도 있겠구나. 그 최소한의 장치마저 없이는 너무나도 위험한 세상이구나. 그래서 씁쓸하지만 다시금 펜스 안의 영화제 부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림2 : 부산퀴어퍼레이드 부스 사이로 피스-무지개 깃발을 몸에 두르고 활보하는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의 뒷모습]
퍼레이드 동안 짐을 정리하고, 돌아온 깃발까지 챙겨 다시금 한참을 돌아 펜스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가을이었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광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늘 퀴어문화축제를 다녀오면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많은 분들에게 따뜻함을 느끼면서도 이 날이 지나고 나면 어디서 어떻게 이 펜스를 무너뜨리고 더 많은 곳에 따뜻함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남습니다. 이번 부산퀴어문화축제는 그런 고민들이 특히 더 생생하게 다가왔고요. “우리 모두 이곳에 있다.”는 것을 넘어 우리는 ‘늘’ 이곳에 있음을 말하고 싶다는 욕망 역시도 커졌습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둘러싼 펜스를 넘어 온 거리와 도로가 무지개로 물드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림3 : 맑고 높은 파란하늘 아래에 서울인권영화제 깃발, 피스-무지개 깃발 그리고 팔레스타인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