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나눠요) 보통의 트랜스들의 위대한 생존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9/11/20
지난 11월 7일에 22회 서울인권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씨씨에게 자유를> 이라는 영화로 신입 자원활동가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씨씨에게 자유를>은 국가폭력, 언론의 보도 행태, 트랜스혐오, 가족, 연대 등 정말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번 ‘함께 나눠요’에서는 지난 11월 16일에 있었던 TDoR 행사와 엮어서 생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도_살고싶다
- 영화에서 한 활동가가 살아있는 트랜스젠더를 위해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익숙한 농담이 생각났습니다. 일반들은 지인 결혼식에서 모이고, 이반들은 지인 장례식에서 모인다고 농담 삼아 얘기할 정도로 죽음은 이 공동체에 익숙한 단어입니다. TDoR도 “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의 줄임말로 한국에서는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1998년 11월 미국에서 한 트랜스여성이 증오범죄에 의해 희생당한 것을 계기로 증오범죄에 희생당한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기억하고 함께 애도하고자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TDoR 행사에서도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동시에 살아남은, 그리고 살아나갈 보통의 트랜스젠더들의 생존을 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분법안에_가두지말라
- 여자 아니면 남자. 두 가지 선택지만이 주어진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종종 위험한 상황에 놓입니다. 영화에서 씨씨는 법적 성별에 따라 남성교도소에 수감됩니다. 처음 3개월 동안 독방생활을 하고 반바지나 딱 붙는 옷을 금지하는 등의 본인이 원하는 성별표현을 못하게 하는 규칙들에 매여야 했습니다. 교도소와 같이 성별로 구분된 공공시설에서 트랜스젠더는 혐오를 경험합니다. 행사에서 연대발언을 하신 QUV 부대표님의 말을 빌리면, 전국 대학 중 성중립화장실 혹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한 학교는 채 다섯 곳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 법적으로 성별을 변경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한국에서 성별변경을 하기 위해서는 생식능력제거수술(자궁/난소/고환 적출수술)을 포함한 성전환수술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적게는 수천만 원, 재수술이 필요한 경우 등을 고려하면 많게는 억 단위의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의료적 트랜지션 비용은 건강보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취업기회에서 차단되는 사람들이 과연 가족과 국가의 도움 없이 성별변경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까요.
- 영화에서 씨씨가 출소 이후 만난 노년 유색인종 트랜스여성은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출소 후 다시 감옥으로 돌아간다고 얘기합니다. 생계를 이어나갈 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죠. 한국도 마찬가지의 상황입니다. 『오롯한 당신』 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282명 중 절반가량(46.6%)이 실직/무직이고 30.8%가 비정규직상태로 경제적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연대발언자 주황빛연대 차차의 활동가 왹비님은 MTF를 비롯한 트랜스젠더퀴어 성산업 노동자들이 수술비용 마련을 위해, 그리고 수술 이후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해 성산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얘기했습니다. 이분법 안에 갇힌 트랜스젠더들에게 생존의 조건은 높은 벽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의_트랜스들의_위대한_생존
- 영화에서 씨씨는 키가 180cm가 넘고 몸무게가 100kg가 넘는 백인 남성의 공격에서 본인을 지켜냈습니다. 그 이후로 불사조 씨씨라고 불리며 사람들 앞에서 연설도 하고 리더십 모임도 주도하는 아이콘이 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씨씨에게 묻습니다, “그 때 가위를 꺼내든 것, 후회하지 않아?” 씨씨는 본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지만 정당방위는 인정되지 않았고 씨씨는 결국 41개월 형을 선고받습니다. 씨씨가 유색인종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겪어온 일상적인 혐오에서 오는 공포는 판결과정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트랜스여성들의 꾸밈행위가 여성성을 강화한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트랜스여성들에게 여성성은 패싱이 안 됨으로써 야기될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사회의 이분법적 성별표현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가위를 들어야 했던 그날의 씨씨처럼 언제든지 조롱과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패싱이 돼도 성별표현과 다른 외부성기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트랜스젠더들도 있습니다. 상대가 트랜스젠더인지 몰랐고 자신이 속았다는 것에 분노하여 상대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가해자들의 변명을 언론은 그대로 받아 적습니다. 이렇게 트랜스젠더들은 사회로부터 ‘당신의 삶은 시스젠더의 삶보다 가치가 없다’고 끊임없이 확인받습니다.
[그림1. 해질녘 푸르게 어두워지는 이태원의 하늘 아래로 TDoR 참가자들이 행진 중이다. 차도의 한켠에 모여 각기 다른 단체의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 그럼에도 11월 16일에 보통의 트랜스젠더들과 친구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이태원 한복판을 행진했습니다. 삶의 터전이자 죽음의 현장인 이태원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우리는 당신 곁에서 살아가는 트랜스젠더라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들을 죄악시하고, 모두에게 평등해야 할 법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들을 불법화하는 현실이지만,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살아남아야 합니다. 씨씨가 사건 이후 많은 밤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지지자들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위대하게 생존하고 있는 보통의 트랜스젠더들을 위해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함께 신나게 행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2. 야외무대에서 전자음악가 키라라가 연주 중이다. TDoR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남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