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펼치기) “정상과 보편”의 정반대에 위치한 이야기들: 4주차 세미나 스케치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9/11/20
영하(영화제 하이라는 뜻)~ :) 지난 11월 14일 네 번째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한편, 한 달 동안 자원활동가들을 반겨주던 고양이 “누나”와 “옥희”가 지난 주에 사무실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고양이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사무실을 보면서 덜컥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매주 목요일마다 낯선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던 사무실보다 편안한 곳으로 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새로운 집이 고양이들에게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 되면 좋겠다는 말을 쓰다 보니 이번 주에 함께 보았던 영화 <기다림>도 “집”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이번 주 세미나 제목은 “시민을 묻다” 였습니다.
영화 <기다림>과 <애국시민학교>는 각각 전쟁과 빈곤 등의 이유로 시민성을 위협 받는 사람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한 마디로 ‘시민으로 인정받기/누가, 어떻게 시민을 결정하는가’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세미나의 1부에서는 난민인권센터의 활동가 강은숙님이 오셔서 <난민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난민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셨고, 2부에서는 영화제 자원활동가 환윤님께서 <군사주의와 시민성>이라는 제목으로 시민성과 군사주의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시민의 기준이 국가의 필요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등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주셨습니다.
<애국시민 사관학교>는 매년 11월 11일, 뉴욕에서 열리는 군인들의 퍼레이드와 그것을 지켜보는 시민들을 비추며 시작됩니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군인들 중에서 유난히 앳되어 보이는 군인들이 눈에 띄는데요, 이들은 주니어 ROTC(이하 JROTC) 생도들입니다. 시민들은 이들을 보며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이들도 이와 같은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라를 수호한다”는 자긍심의 이면에 살인과 전쟁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며 낯설지 않지만 익숙해지기 어려운 단단한 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국 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미국방부의 모병활동은 학내 교련수업, 군인캠프 등 일상적인 모습으로 미국사회에 스며들어있습니다. 주의해 볼 만한 지점은, 표면적으로는 “직접적인 모병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실상 노골적으로 특정집단을 그들의 대상으로 삼는 치밀한 “전략”입니다. 23회 인권해설집에 실린 <애국시민 사관학교>의 프로그램 노트에 나와있듯이, JROTC 생도의 대부분은 라틴계와 아프리카계 학생들이고, JROTC가 가장 많이 운영되는 곳 또한 빈민층, 소수인종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러스트벨트의 빈민가와 미국 남부입니다. 다시 프로그램 노트의 한 부분을 가져와보자면, “인종적, 경제적 소수자성은 시민으로서의 위치를 위협한다. 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라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더 ‘미국 시민’다워지고, 법적인 자격을 쌓아야 하는 자는 사회적 소수자다.”(23회 인권해설집 『적막을 부수는 소란의 파동』, 117쪽)는 설명이 미국방부가 실행하는 “전략”의 핵심 조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자원활동가들은 미국방부가 실행하는 교련수업의 모습이 어릴 적 경험했던 학교 조회시간을 연상시킨다는 점, 교련수업을 진행하는 전직군인들이 강조하는 바와 다르게 그들은 학생들과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모병대상”으로서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 군대를 홍보하는 방식이 재미난 놀이 혹은 수련회를 연상시킨다는 점, “군인”과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을 마치 다른 사람처럼 홍보한다는 점 등을 지적했습니다.
<애국시민 사관학교>에서 인종적, 경제적 소수자에 위치한 학생들이 군인되기를 통해 시민성을 획득하려고 하듯, <기다림>에서 아프가니스탄 난민 록사르와 그 가족들은 덴마크의 시민으로 인정 받기 위해 애쓰지만 이민국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을 보면서 “집”과 “고향”에 대한 스스로의 고정관념을 돌이켜 볼 수 있었는데요. “집” 혹은 “고향”이란 말을 들으면 “편안함”, “따스함”, “향수” 같은 감정이 떠오르고, 자연스럽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록사르에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아프가니스탄은 “돌아가고 싶은 집/고향”이 아니라 죽음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절망의 땅입니다.
오히려 록사르에게 “집”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도착한 덴마크입니다. 덴마크에서 지낸 시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낸 시간보다 짧지만, 덴마크에서는 죽음이 아닌 삶을 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록사르는 덴마크에서도 삶을 그려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점차 잃어가는데요, 덴마크 이민국으로부터 정착에 대한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덴마크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부모님을 대신해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나가는 록사르는 자신과 가족이 난민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돌아갈 수 없지만, 머무를 수도 없는 “이방인”은 “집”이라는 삶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일상적인 두려움에 잠식되어 갑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한 나라이지만,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난민인권센터의 강은숙님이 전해주신 한국정부에 대한 이야기들 중 자원활동가들의 공분을 샀던 한 가지는, 난민신청자는 6개월 간 취업의 기회가 제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난민신청자들 중 3%만 생계비를 지급 받는 현실에서 이와 같은 처우가 의미하는 바는 떠나든지, 혹은 불법적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난민들에게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막대한 생계비를 지급한다” 등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불법-난민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현실의 조건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림1. T자로 길게 뻗은 책상 주위로 자원활동가들이 모여 세미나 중이다. 맨 앞 스크린에서는 난민인권에 대한 파워포인트 자료가 영사되고 있다. 가운데 즈음에 앉은 난민인권센터 강은숙 활동가가 노트북 화면을 보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자원활동가들은 스크린을 보거나 필기 중인 노트, 패드 등을 보며 강의에 참여하고 있다.]
<기다림>에서 록사르와 가족들이 덴마크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존재한다는(혹은 존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애국시민 사관학교>에서 등장했던 인종적, 경제적 소수자성을 지닌 사람들 역시 미국 사회의 “이방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세미나에서 보았던 <씨씨에게 자유를>에서 미국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 중 흑인의 비율이 아주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그러고 보면 미국사회에서 범죄-흑인의 연결고리 역시 낯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가 설정한 시민의 조건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한 사회의 “이방인”으로 존재하며 범죄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다시 “(잠재적)범죄자”라는 시선 속에서 시민으로서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취약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지점은, 그와 같은 취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인을 선택한 “이방인(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유 수호”라는 명목 아래 전쟁을 수행하고, 그 전쟁의 한 가운데에 있던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 타국에서 또 다른 “이방인”이 된다는 사실 같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집”과 “고향”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을 돌이켜보며 문득 인권영화제를 준비하는 내게 필요한 태도는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에는 “정상적인” 가족, 집, 애국, 사랑, 시민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위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지만, 정작 귀 기울여야 할 것은 의심해볼 생각조차 못했던 “정상과 보편”의 정반대에 위치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하는. 앞으로도 세미나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면서 또 다른 잔디라, 씨씨, 록사르, 사울의 이야기를 만나고 싶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