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임활동가편지) 병아리 상임활동가의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0/01/02
안녕하세요,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입니다. 이 인사말을 하게 된 지 벌써 세 달이 지나갑니다. 처음에는 정말 어색했는데 이제야 입에 붙네요. 새해 울림의 첫 편지로 조금은 늦은 인사드립니다.
가끔 삶은 “어쩌다”의 연속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다 만났어? 어쩌다 하게 됐어? 누군가 물어올 때 자주 하는 말은, “어쩌다 보니…” 성의 없는 대답인 것 같아 망설이다가도, 달리 말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 않으신가요?
서울인권영화제 역시 어쩌다 만나게 되었습니다. 2010년, 마로니에 공원에서였던 것 같아요. 제가 어떻게 거기에 있었는지, 영화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갔는지 모르고 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 한 영화를 보았고, 서울인권영화제를 알게 되었고, 당시의 작은 용돈에서 아주 조금을 덜어 정기후원을 시작했던 것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후원활동가의 이름으로 함께 한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러다 2016년 자원활동가로 서울인권영화제의 사무실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되었어요. 21회였습니다. 그렇게 21회와 22회를 함께 하고, 23회에는 살짝 발을 담갔습니다. 살면서 경험한 공간 중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집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며, 바깥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공부하며, 파트타임 노동을 하며, 그러는 동안 맺는 관계들 속에서 느끼는 모든 분노와 슬픔과 행복까지 나눌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너는 너무 이상적이야, 그렇게 현실감 없이 생각하면 어떡하니,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야? 수도 없이 듣던 말들을 듣지 않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대신 이상을 함께 나누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현실이라 하고, 어쩔 수 없다며 가려지던 존재들을 함께 드러내고... 그래도 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력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제 자신을 위해 지속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해요.
그리고 가을부터 상임활동가로서 사무실에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마치 피카츄가 라이츄로 진화하듯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한 변화가 아닌가 두렵기도 했습니다. 나는 항상 활동가의 친구로만 살아왔는데, 내가 활동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지금까지도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 고민이 됩니다. 다만 제가 2010년부터 서울인권영화제로부터 받았던 힘을 이제는 서울인권영화제와 함께 제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다짐을 합니다. 지난 몇 년간 서울인권영화제의 모든 시간과 공간은 저에게 깊은 지지가 되어주었습니다. 이 마음을 좀 더 많은 우리의 삶 속에서 좀 더 다양한 우리의 공간 속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제 새해입니다. 2020년이면 제가 서울인권영화제를 어쩌다 마주친 지 10년이 되네요. 알면 알수록 사랑이 깊어지면서, 도전해보고 싶은 활동들도 많아집니다.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24회 서울인권영화제를 준비하는 회의가 시작됩니다. 저희 모두 매주 목요일마다 일명 ‘안전한 초가집’에 모여 올해의 영화제를 치열하게 상상하겠지요. 2년 만의 영화제인 만큼, 병아리 상임활동가로서의 첫 영화제인 만큼, 무엇도 게을리 하지 않고 푹 빠져서 하고 싶습니다. 좋은 인권영화로 다양한 존재들이 어울려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에 대해 떠올릴 때 보다 다양한 모습을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곁에 존재함을, 존재해야 함을 느끼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새해에는 보다 건강하고 기쁜 소식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그 누구도 사라지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의 곁이 더 넓어지기를 바라며,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우리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애정과 연대로 지켜봐주세요. 저 역시 애정하는 마음 잃지 않고 연대하겠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