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나눠요) 코로나19와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는 똑같이 아프지 않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0/02/26
*[함께 나눠요]에서는 서울인권영화제의 지난 상영작을 함께 나눕니다. 이번 호에서는 20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나눕니다.
청도대남병원 5층 정신병동의 정신장애인 입원자 102명 중 100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98퍼센트, 사실상 전원감염이다. 그곳은 ‘보호병동'이라고 이름 붙은 폐쇄병동이었다. ‘보호병동'의 첫 사망자는 20년의 입원 생활 끝에 42kg의 작디 작은 시신으로 병동을 나갔다. 지금까지 대남병원의 폐쇄병동에서 나온 코로나19 사망자는 총 6명이다.
시설 내 집단감염은 계속되고 있다. 칠곡군 밀알사랑의집에서는 22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밀알사랑의집은 “가족의 돌봄이 어려워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중증장애인의 시설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또 다른 장애인수용시설인 예천의 극락마을에서도 근무자 2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입소자 52명은 다른 시설에 격리되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아프고, 죽고 나서야, 미어지는 마음으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보호”가 아닌 격리였다. “책임”이 아닌 방치였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안전으로부터 방치되었다. 누군가는 피할 수 있었던 감염을, 그들 모두 피하지 못했다. 어느 곳도 이들을 “보호”하지 않았고 “책임”지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수용시설에 내맡겨야 했던 이들은 바깥 세상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코로나19를 맞닥뜨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해야 한다. 재난 앞에서 우리는 평등하지 않다. 똑같이 아프지 않다.
불안의 언어들이 가득하다. 중국인을 입국 금지시켜야 한다, 대구를 봉쇄해야 한다, 신천지를 해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어떤 존재들을 금지시켜왔고, 그들의 삶을 봉쇄시켜왔으며, 이들의 존엄을 낱낱이 해체해왔다. 우리는 또한 쉽게 말하곤 한다. 재택근무를 하자, 일을 쉬자, 돌아다니지 말자, 마스크와 소독을 철저히 하자, 기관과 시설의 문을 닫자. 그러나 재택 근무를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이 있다. 며칠 일을 쉴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마스크와 소독제를 한가득 살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기관과 사람의 지원 없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지금 여기 같은 날 같은 땅에, 아플 때 아프다고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그림1 : 영화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스틸컷. 오른쪽에 펼쳐진 아스팔트 길을 따라 휠체어를 탄 사람과 그 휠체어를 밀어주는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길 곳곳에는 자동차와 트럭들이 주차되어 있고, 잎이 다 떨어진 나무와 갈색빛을 띄는 잔디가 도로 맞은편에 있다.]
20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서는 동일본 대지진에 이은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참사로 피해를 입은 장애인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방사선 노출 위험으로 인한 정부의 “대피하라” 는 지시는 모두에게 똑같이 닿을 수 없었다. 몇십 년동안 만들어 온,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이 한순간에 위험지역이 되었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공간에 남든, 대피소로 피난을 가든 결정을 해야 했다. 선택지만 뚜렷할 뿐 대책은 흐리다.
방사선 노출 위험으로 대피 명령이 떨어진 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피난소의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등 장애를 이유로, 모두가 떠나고 있는 터전에 남겨졌다. 자택에 남아도 걱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장애로 인해 구호물품을 받으러 가기 어렵고, 기름이나 전기, 가스가 모두 끊어질 불안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피소로 떠난 사람들도 있다. 휠체어에서 내려올 수 없어 앉아서 자야 하고, 화장실에도 제대로 가지 못한다. 경사로가 있는 곳도 있지만 너무 가파르거나 좁다. 사사키 루미 씨는 피난을 갔다가 ‘장애가 있으니 집이 있다면 돌아가 있으라’는 지역주민의 말을 듣고 혼자서 집으로 돌아왔다.
대지진으로부터 1년, 감독은 그들의 삶을 다시 찾아간다. 사사키 루미 씨는 자신의 마음도, 상황도 ‘바뀐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선택의 결과는 개인의 몫이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선택이 있었을까.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애인들의 재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막을 수 없는 재해 앞에서 인간은 평등한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19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위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차별을 마주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장애, 젠더, 빈곤 등을 이유로 감염에 더욱 취약한 소수자들은 다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대응책에 더욱 힘든 상황이다. 공간이 폐쇄되어 자신을 돌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폐쇄된 공간 안에서 세상과 격리된 사람들이 있다. 구호물품을 구할 수 없어 불안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소통이 어려워 정보조차 접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이겨내야 할 것은 바이러스 뿐만이 아니다. 불안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책임을 떠안길 누군가를, 내가 속한 곳이 아닌 어딘가를 찾는다. 폐쇄병동과 수용시설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탈원과 탈시설을 말하는 대신 더 강력한 폐쇄를 외친다. 실제로 보건당국은 대남병원 코호트 격리를 실시했다. 폐쇄와 격리가 보여주는 안전과 보호란, 사실 그 바깥의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기만하고 있다. 늘어나는 사망자의 숫자는 그저 숫자로만 이야기될 수 없다. 그 숫자는 분명, 어디에는 존재하고 어디에는 존재하지 않는 숫자다.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분리하는 혐오와 배제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수 없다. 바이러스로부터 회복되더라도 차별과 배제가 남아있는 사회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평소에 어떤 존재들을 지우고 있었는지는 재난 상황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코로나19를 이겨낸다는 것은, 재난 상황 속에서 마주하는 차별과 배제, 혐오를 이겨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똑같이 아프지 않았음을 안다는 것이다. ‘건강한 상태’는 모두에게 다르다. ‘안전'의 조건은 모두에게 다르다. 안전이 특정한 사람들만을 향해 있는 건 아닌지 꾸준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해야 한다. 재난 앞에서 우리는 또 다시 누군가를 버리지 말자.
특정한 건강에서, 특정한 안전에서, 특정한 사회에서 빗겨나 바이러스를 맞닥뜨린 이들이 무탈하게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시설 밖으로, 차별과 배제의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이러스가 지난 자리에 혐오가 아닌 사람이 남기를.
*영화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영지원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영화를 함께 나누고 싶으신 분들은 서울인권영화제로 연락 주세요. 02-313-2407, hrffseoul@gmail.com
서울인권영화제 은긍, 고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