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나눠요) 시국페미: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을 생각한다

(함께나눠요) 시국페미: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을 생각한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 최영미, ‘돼지의 변신’ 중에서

 

고은의 성추행을 고발하여 문단 안팎에 파문을 일으킨 최영미에게, ‘돼지’는 비단 고은뿐만이 아니었다. 문단에나 정계에나 ‘돼지’들은 널려 있었다. 고은을 고발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최영미는 앞으로도 ‘돼지’들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며 견고한 권력에 균열을 내기로 작정한 듯 하다. 그는 87년 진보진영의 대선 캠프에서 활동할 때도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조언이 필요했던 그에게 ‘선배 언니’는 “네가 운동을 계속하려면 이것보다 더 심한 일도 참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안희정 성폭력 피해생존자 김지은은, 진보진영의 촉망받던 정치인을 끌어내렸다는 이유로 온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이번 3월, 그는 <김지은입니다>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의 출간은, 그가 새로운 삶을 꾸리기 위해 필히 거쳐야 할 과정이었으며, 미투 이후 “세상을 향한 두 번째 말하기”였다. 안희정의 성폭력을 고발하고 2년만이었다.

 

다른 나라 이야기도 해보자.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도 깊이 각인된 배우 아델 에넬은, 프랑스 미투의 물결 속에서 열두살 때 데뷔작의 감독에게 성추행당한 경험을 폭로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 2월 아델과 그의 동료들이 참석한 세자르 영화제에서는 아동 성범죄자로 유명한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상을 수상했고, 한 남성이 “로만 폴란스키 만세!”라고 외쳤다. 하필 아델의 등 뒤에서. 아델은 프랑스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는 영화제의 시상식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는 ‘분위기를 망칠까’ 걱정하지 않았고, 세자르의 부당함을 만방에 알렸다.

 

그간 우리는 숱하게 들어왔다. 나중에, 나중에… 대권을 노리는 유력 정치인이니까, 노벨상을 받을지도 모르는 문학계의 원로이니까,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니까, … 박수를 치지는 못할 망정 성공 가도에 재를 뿌리지 말라는 경고들. “여자 문제”는 좀 있지만,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하겠냐는 일축들. 지금 여기에는 그보다 중요한 사명이 있다는 충고들. 왜 큰 그림을 보지 못하냐는 질책들. 일단은 적을 이겨야 하니까, 지금은 세상을 바꿔야 하니까, 그 다음에 뒤를 돌아봐도 늦지 않다는 타이름들. 놀라운 작품을 쏟아내는 예술가를 지켜보자는 ‘유보적 태도’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어온 말, 말, 말. 이제 이 말들의 유통기한은 지났다.

 

우리는 이제 이 이상한 풍경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변화를 꿈꿔야 할 운동과 정치가, 어떤 이들의 비참한 현실은 당당하게 외면해왔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인간을 탐구하고 아름다움을 창조해야 할 문학과 예술이, 고작 파렴치한 ‘거장’들의 전유물이 되어왔다는 것은 절망적이지 않은가? 당신들이 그리는 진보에, 당신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우리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을진대 우리는 왜 그저 ‘순종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던가?

 

약한 자들을 밟고 올라서 만든 ‘당신들의 천국’은 과연 얼마나 지속 가능한 것인가? 불의에 대한 고발로 단숨에 무너져내려버릴 공동체라면, 그것을 애써 위태롭게 지속하는 데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부질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네들의 미래가 결국 구시대의 복사판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질문하고, 누구의 욕망과 꿈과 이상이 그 이야기에서 삭제되었는지를 살피자는 말이다.

 

23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 <시국페미>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이 척박한 땅에서 꿈꾸고, 떠들고, 행동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여자들에 대한 영화다. 이들이 기억하고 증언하는 촛불 시위는 오래 전의 일인 것만 같지만,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이 ‘페미니스트들’의 싸움은 결국 현재진행형이다. 돌아온 3.8 여성의 날에 우리는 다시금 <시국페미>를 생각했다. 

 

[그림1. 영화 <시국페미>의 한 장면.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페미가 세상을 바꾼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그림1. 영화 <시국페미>의 한 장면.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페미가 세상을 바꾼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대통령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촛불의 현장은, 어떤 변화를 목전에 둔 ‘역사적인 순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분명 모두의 축제는 아니었다. 박근혜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 남성 정치인은 “앞으로 100년 동안은 여성 대통령 꿈도 꾸지 마라” 했고, 시위 현장에서는 노골적인 성추행이 난무했으며, 페미니스트 깃발을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이들은 저열한 모욕과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운동을 계속하려면 그것보다 심한 일도 참아야 했을까?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마이크를 쥔 자들이 말하길 ‘우리’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데, 그 ‘우리’ 속에 ‘나’는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다음의 세상에도 ‘내 자리’는 없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언젠가 올지도 모를 ‘나’의 차례를 가만히 기다려야 했을까? 혹은 조용히 떠나는 게 쉬웠을까? 끝없는 질문들이 맴돌았다.

 

그러나 이 ‘페미’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남아, “서로의 용기가 될 것”을 약속하면서 ‘다른 방식의 변화’를 상상했다. 집회 현장의 여성혐오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목청을 높였다. “이 시국에 한가하게 낙태죄 폐지를 운운하냐”며 변화의 ‘우선순위’를 가르치려드는 ‘진보 마초’들을 꼬집었다. 여성혐오적인 가사로 광장에서 노래하려 했던 DJ DOC를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광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쉬이 발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운동을 장기적으로 가져가기 위해 페미니스트의 정치세력화를 시작했다. 페미니스트들은 “프락치”이며 “진보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존재”라는 악질적인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이들은 구 정권의 퇴진이 우리가 당도해야 할 종착역이 아님을 알았다.

 

여기,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이 있다. 우리는 이 해일이 세상을 바꿀 것임을 믿는다.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