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4회 서울인권영화제를 연기하며: 코로나19와 우리의 자리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0/03/31
2020년 24회 서울인권영화제를 연기하며: 코로나19와 우리의 자리
코로나19로 세상이 소란스러운 사이 더딘 봄이 왔습니다. 많은 일들이 미뤄지고 취소되는 가운데, 24회 서울인권영화제 역시 오는 6월이 아닌 가을에 개최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국내작 선정 발표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기 소식을 전해드려 아쉽습니다. 하지만 서울인권영화제는 지금 우리가 마주한 세상의 이면들에 관해 보다 깊고 세심하게 고민하고, 모두가 온전히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일시정지된 것만 같습니다. 나의 작은 움직임 하나가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지고, 다른 사람의 작은 움직임 하나, 하나에 신경이 곤두섭니다. 나들이도, 여행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합니다. 크고 작은 행사들도 앞다투어 행사를 미루거나 취소합니다. 매일 아침 검색창에 ‘코로나19’를 검색하며 늘어난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확인하고, 언제쯤 다시 예전처럼 일상을 살 수 있을까 기다립니다.
끝없이 기다리던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는 몇 명, 이 나라에는 몇 명, 저 나라에는 몇 명… 어느 순간부터 숫자로만 이 사태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늘어나는 숫자 속에 가려진 사람과 관계, 장면과 사건이 무수히 많습니다. 한국정부의 ‘발빠른 행정’에 마냥 갈채를 보낼 수 없는 것은, 과도한 동선 공개로 삶이 헤집힌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한국인의 ‘질서정연한 한마음’을 마냥 자랑할 수 없는 것은, 좁디 좁은 격리시설에서 집단으로 감염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산업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마냥 찬양할 수 없는 것은, 태산 같은 택배상자 앞에서 쓰러진 택배 노동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뿐만이 아닙니다. 환자의 기대 수명을 계산해 오래 살 수 있는 환자를 우선적으로 치료한다는 어느 나라의 소식을 접하고 마음은 더 참담해집니다. 24회 서울인권영화제의 상영작을 선정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시에 전세계에서 오는 죽음의 소식들을 마주했고, 상영작 수급을 위해 그 나라의 영화사에 이메일을 쓰는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영화제의 활동가들도 매주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모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24회 서울인권영화제 뿐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가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뒤집고 헤집는 지금 우리가 당장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세계의 모습은 낯설지만 낯선 것이 아닙니다. 대형화재, 경제공황, 지진, 해일, 핵발전소 사고 등 지금까지 겪어온 재난과 재해 속에서 가장 먼저 고통 받고 죽어간 이들의 장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이전부터 이미 취약했던 사람들의 현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코로나19를 “이겨내자”고 말할 때, 누구와 함께 무엇을 이겨내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싶습니다. 확진자의 숫자를 낮추기 위한 노력에서 더 나아가, 전염병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조차 불평등하게 경험하는 이 상황 역시 극복해야 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안전’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이 깎여나가야 하는 시스템 역시 ‘극복’해야 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조심하기 위하여” 영화제를 연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개인이 조심하는 것만으로는 지금의 코로나19 사태는 물론, 앞으로 닥칠 재난과 재해 역시 극복하고 예방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사태를 마주하고 이겨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24회 서울인권영화제가 광장에서 여러분을 만나는 날은 가을이겠지만, 그 전에 이러한 고민들을 담아 연대할 수 있는 자리를 온라인으로 마련하고자 합니다. 코로나19 속에서 목격한 장면들, 그리고 앞으로 마주할 장면들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함께 여러분을 만나고자 합니다. 부디 모두가 온전히 안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여러분 모두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2020년 3월 31일
서울인권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