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편지) 거리깨기

(관객편지) 거리깨기

 코로나19 인권영화제에 오른 모든 영화의 첫머리는 절규와 침묵이 배인 트레일러로 시작된다. 장면 하나, 한 장애인권활동가가 분노와 울음을 머금고 외치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도망갈 수 있는 권리를 주세요... 다 같이 뒤엉켜서 감염되고 뒤엉켜서 죽고, 매일매일, 오늘도, 내일도 죽을텐데 사람이.” 장면 둘, 용역과 물대포가 밀려드는 철거 현장을 향해 확성기를 들고 누군가가 외치고 있다. “살인행위를 멈춰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법 집행이 아닙니다. 멈춰주시길 바랍니다. 대놓고 살인하는 대한민국. 이 개같은 개발 때문에 살인하는.” 장면 셋, 노량진 수산시장에 용역과 포크레인이 들어오고 상인들은 밀려난다. 눈을 가린 한 상인이 천막에 쓰러진 채 울고, 곧이어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정적이 흐르는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먹었다. 심호흡을 하고 영화들을 보아 내려갔다. 한 편 한 편을 볼 때마다 현실로 잡아 끌려 내려진 듯했다. 내 방이 너무 안락해서 자주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잊는다. 아, 이랬지. 그랬구나. 혹은 ….

 

  코로나19가 막 사회를 휩쓸 때, 난무하는 혐오와 비보에 덜컥했다. 바이러스가 촉발한 사회적 파장, 바이러스가 드러낸 사회의 민낯을 예의주시했다. 매일 아침 뉴스를 보는 건 나에게만 괴로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청도 대남병원, 밀곡 칠알 사랑의 집, 구로 콜센터, 쿠팡 물류창고, 이태원 성소수자 클럽 등 위험이 누구에게 몰리는지 분명해질 때마다 참담함과 싸워야 했다. 이때 즈음 잘 곳이 없어서 불가피하게 하루 홍대 옆 찜질방에서 잔 적이 있었다. 근처 24시 사우나가 다 문을 닫았고, 유일하게 연 이 사우나는 요금을 14000원으로 올려 받았는데, 일 미터 거리두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노숙인, 노인, 가출 청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충격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말해지지 않는 ‘현실’은 참 시리고 슬프고 그렇다.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예술 유행에 거북함을 느낀다. 공허한 관념 놀이에 신물이 나 있다. 버젓이 절규와 고통이 놓여있는 현실에 대해서 왜 이리 말하는 이가 적은가. 인권영화제가 좋았던 이유다. ‘코로나19 인권영화제: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의 상영작들은 아프고 치열했다. ‘이 위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이 위기 이후에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흘러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공통으로 배어 있었다. 현실에 뿌리박지 않으면 그러기 어렵다. 영화제의 영화를 따라가면서 이 물음들을 다시 곱씹게 되었다.   

 얼마 전 정부는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방역 성공의 지표는 경제성장률로 제시됐다. ‘OECD’ 국가들에 비해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적은 폭으로 하락했고 외신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방역에 성공했다는 증거란다. 그러나 축배를 들기에는 비극이 너무 많지 않았나. 드러난 문제들도 너무 뚜렷하지 않나. 벌써 눈물이 다 말랐나. 

 

 매일 코로나19 사망자가 뉴스 속보로 올라오고 모두의 시선이 그 수에 쏠린다. 약 6개월 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300명에 가까워졌다. 이들의 분포도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낼 테지만, 다른 ‘수’의 면면이 두드러진다. 올 상반기 이륜차 교통사고로만 죽은 사람은 253명(경찰청), 코로나 이후 무분별하게 늘어난 플랫폼 배달업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살로 목숨을 끊은 이가 3월에 1085명, 4월에 1049명, 5월에 1079명으로 상반기에 약 6000명, 하루 30명 이상, 한 달 1000명이다(통계청 성/월별 특정 사망원인-고의적 자해 사망자 수 통계). 사람의 목숨을 수로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수’, 그 수가 가리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묻는 것은 절박하다. 제도에서 ‘논외’로 친,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 있었던 광주 성인발달장애인 질식사 후 부모 자살 사건, 제주도의 장애학생 죽음과 부모 자살 사건을 생각하면, 코로나가 입힌 상흔에 ‘선방’ 따위의 말을 대는 것은 염치없음에 다름 아니다. 

 

 자영업자, 상인, 임시직 노동자들의 소득이 끊어지고, 이 ‘빌려 쓰는 사람들’에게 매달 내는 월셋날이 어김없이 다가왔다. 착한 임대인 운동? 몇 번 몇 달 선행으로 사회의 불평등 추이가 움직일 리가 없다. 대부분의 건물주 집주인 땅주인은 상대적 (불로)소득을 얻었다. 모두 짐작하는 대로다. <퀴어의 방>을 보면서 저기 살고 있는 이들이 월세는 잘 냈을까 걱정이 됐다. 

 이 ‘위기’를 틈타 명분을 잔뜩 안고 은밀하게, 졸속으로 이루어지는 것들도 있다. 재난을 틈탄 자본주의의 움직임, ‘쇼크 독트린(shock doctrine)’이라 이를 수 있다. 문중원 기사 분향소를 코로나 감염의 명분으로 치워버리고, 노량진과 청계천 을지로를 ‘신속하게’ 밀어붙였으며, 총선에서 진보 의제들을 대강 흡수해 소수의 목소리를 밑바닥에 묻어버렸다. 이렇게 ‘골칫거리’를 치워버린 채, 포스트-코로나를 말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의 긴급함에 대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 덕인지 정부의 이번 발표에는 (1)디지털 뉴딜과 (2)그린뉴딜에 이어 떡하니 ‘(3)고용사회안전망’이 들어가 있다. 내거는 비전에도 ‘포용’, ‘그린’, ‘복지’, ‘안전망’, ‘복원력’ 등 바라는 가치는 다 걸려있다. 하지만 뉴딜의 내용은 비대면+스마트그린 산업을 육성하고, 전기차 개발에 자금을 쏟고, 가장 빠른 5G 통신망을 구축하는 것들이 골자다. 이들이 야심차게 내세운 이것들이 과연 안전망을 만들고 복원력 있는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쓰겠다고 약속한 돈들이 지금 가장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갈 수 있을까. 국가적 열등감에 푹 젖어 ‘선도’와 ‘혁신’, ‘차세대 리더’를 남발하고 K-방역을 칭송하는 것으로는 단언컨대 아무도 구할 수 없다. (그린뉴딜의 원래 방향성은 사회를 ‘기후위기를 막고 불평등을 해소해’ 안전한 궤도로 돌려놓는 전환임을 강조해둔다.)

 

 기후위기에 대한 말을 더 해야만 한다. <멈출 수 없는 청년들>에서 말해주듯 10년 뒤에는 강산이 아니라 지구가 (돌아오지 못할 지점으로) 바뀐다. 코로나19가 기후변화가 낳은 재난 중 하나임을 생각 할 때, 우리의 미래는 지옥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다. 현존하는 모든 불평등, 위협, 위험을 폭발시킬 것이다. 코로나가 그런 것처럼, 이제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기후문제가 환경문제에서 나아가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말해져야 하는 까닭이다.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동학이 영화제 상영작들에서 보인 수많은 사람들을 울린 이유와 같다면, 그리고 코로나19를 포함해 앞으로의 기후 재난이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을 더 극심하게 밀어붙이고 말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고 연대가 절실하다. ‘거리두기’가 미덕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 거리를 부수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거리 깨기’를 상상하게 된다.

 

 영화제 방식에 대해서는 '서울인권영화제'가 '서울'에 한정되지 않고 넓혀지게 되었다는 점, 매일 노동이 차 있는 사람들의 접근성이 더 용이하게 확장되었다는 점을 좋게 보았다. 한편으로는 축제 형태의 영화제가 사라지면서 얼굴을 맞대는 연결망이 무너진 점이 안타까웠고, 미디어의 탄소배출량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제를 포함해 온라인 형태의 기획·시도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보다, 영화제를 준비한 활동가들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는 게 후기에 걸맞겠다. 멀리 있었던 이들과 거리를 깨고 연결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코로나19 인권영화제 관객 너도나라 노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