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X서울인권영화제) '원형' 바깥의 삶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0/08/26
* 차별금지법 제정을 향한 움직임이 뜨겁습니다. 울림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 서울인권영화제의 지난 상영작 <깊고 오랜 사랑>과 함께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는 글을 싣습니다.
둘은 수십 년을 함께 살았다. 각자에게는 서로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 다른 한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술동의서에 서명하지도 못하고 그저 먼발치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픈 이의 친척이 찾아오자 간병인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된 그는 둘이서 수십 년을 살아온 아파트에서도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비참한 상황에 내몰린 그는 결국 죽음을 택했다. 두 여고 동창의 실화에 바탕을 둔 <깊고 오랜 사랑>의 이야기다.
“둘이서 평생을 약속했다”라는 절규에 친척은 망측하다는 듯 “여자 둘이서 무슨”이라고 맞받아친다. 두 여자의 관계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은 가족도 애인도 무엇도 아니고 ‘친구’ 정도밖에는 없다는 투다. 그리고 그렇게 이름 붙임으로써 이 관계는 ‘다소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 바깥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위상이 그렇다. 하지만 친구가 뭐 어때서? 물론, <깊고 오랜 사랑>을 ‘두 할머니의 우정 서사’로 읽는 안전하고 게으른 독법에는 반대하고 싶지만, 설령 ‘친구’라는 이름을 그대로 붙인다 해도 이 관계의 특별함을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사진1. 영화 <깊고 오랜 사랑>의 스틸컷. 한 사람이 병원 침대에 앉아 있고, 다른 한 사람이 앉아 있는 사람에게 밥을 떠주고 있다.)
기실 각양각색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요즘, 혈연관계와 혼인 관계를 중심으로 상상되는 ‘가족’ 개념의 고리타분함에 대해 더 말해 무엇 할까. 어떤 ‘원형’들에 대한 사회의 병적인 집착은 개인들로 하여금 온전히 ‘나’로 살 수 없게 한다. 가령 홍승은의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에 따르면, 저자와 동거하는 애인 지민은 폴리아모리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징계를 받기에 이른다. 인터넷상에서 이들의 관계를 왈가왈부하는 댓글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이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게 고루한 ‘원형’들에 매여 ‘원형에서 비켜 나간 존재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일삼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마다의 삶이 변해가는 속도에 비해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변화하는 속도는 한없이 느린 것 같다. 우리 사회는 관계의 양상이 여러모로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하다.
제도가 바뀌면 뭔가 좀 달라질까? 직관적인 이름을 가진 차별금지법이 어쩌면 모두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역시 이 땅의 수많은 비규범적 존재들을 직접적으로, 완전하게 구제해주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중요한 발판이자 시작점이 되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당신이 누구이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건, 당신을 나의 존엄한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환영하겠다는, 사람들의 결연한 의지가 모인 법. 그런 제스처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삶들은 한층 살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차별금지법은 위태로운 자리를 지키고 선 이들을 향한 ‘환대의 법’이다. 차별금지법이라는 하나의 상징과 함께 사람들은 저마다 상대를 환대하는 법을 배워 나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상대를 ‘사람 취급’하는 법을 좀 배워야 한다.) 그런 법을 하나 만드는 데 무에 그리 지난한 싸움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심지
*<깊고 오랜 사랑>은 21회 서울인권영화제: 나는 오류입니까 (2016) 중 ‘가족을 묻다’ 섹션의 상영작입니다. 두 영화 모두 상영지원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영화를 함께 나누고 싶으신 분들은 서울인권영화제로 연락 주세요. 02-313-2407, hrffseou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