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펼치기] 고요하고 소란하게

[활동펼치기] 고요하고 소란하게

요즘 영화제 사무실의 거실은 매일 소란합니다. 24회 상영작들의 수어통역을 촬영중이거든요. 평소에는 하얀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인 회의장소이지만 벽에 걸린 그린스크린을 내리면 수어촬영스튜디오가 됩니다.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고 모니터를 준비하면 촬영 준비가 완료됩니다. 검은색 상의를 입은 수어통역활동가와 농인 활동가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 촬영이 시작됩니다. 

카메라가 켜지고 모니터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면 수어통역이 시작됩니다. 부드러운 손가락의 움직임이 공기를 가르고 통역사의 표정이 쉴 새 없이 변합니다. 뜻을 알지 못하는 언어들로부터 감정이 전해집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어를 사용하는 청인으로서, 수어통역 현장을 보고있으면 하나의 공연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서울인권영화제는 더 적확한 수어통역을 영화에 싣기 위해, 지난 코로나19 인권영화제때부터 한국농인LGBT 활동가들과 협업을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어떻게 통역 할지 논의하고, 현장에 수어통역을 배치하는 방식도 같이 결정합니다. 코로나19 인권영화제의 라이브토크에서 만들었던 수어통역 포맷은 그 고민 끝에 나온 결과였습니다. 

한국농인LGBT 활동가들은 영화제 통역을 위해 청인 수어통역 활동가와 농인 활동가가 같이  팀을 이뤘습니다. 각 팀별로 영화제의 섹션을 나눠 맡고 상영될 영화를 미리 보며 통역을 논의하는 과정을 가졌습니다. 이 부분은 저희가 이번 협업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 중 하나입니다. 

한국어와 한국수어는 다른 언어이기 때문에 통역을 위해서는 합의와 준비가 필요합니다. 기존의 수어에 없는 단어가 나오면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 수어통역 활동가와 농인활동가, 영화제 활동가가 같이 논의합니다. 각 팀에게 주어질 영화를 미리 공유하여, 통역을 준비할 시간을 가집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관련 영화의 수어통역 촬영이 있는 날이었어요. 기존 수어에 없는 단어가 많았던 탓에 통역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고민을 하던 수어통역활동가가 영화제에 긴급 요청을 해왔어요. “팔레스타인에 대해 좀 알 수 있을까요?” 그렇게 늦은 밤 온라인 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한국농인 LGBT활동가들이 궁금한 것을 물으면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는 영화에 담긴 뜻과 의미를 설명해주었죠. 덕분에 수월하고 신속하게 촬영을 마쳤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저희는 ‘수어통역 연출’이라고 부릅니다. 

[사진1.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 안에서 진행 중인 수어 통역 촬영 현장. 벽에 걸린 그린스크린 앞에서 수어 통역사가 통역 중이다. 주변에는 두 개의 조명이 통역사를 비추고 있다. 거실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텔레비전 화면이 통역사를 향해 놓여있다.  텔레비전 뒤에 있는 노트북에서는 코로나19 상영작 '문밖으로'가 재생 중이다..]

한국농인LGBT 활동가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수어통역 준비 과정에는 농인 당사자의 의견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청인 수어통역사의 의견을 반영한다죠. 때문에 농인에게 만족스러운 수어통역을 찾기가 어렵다고 합니다(이 내용은 울림 19호 “보석활동가의 코로나19 인권영화제 수어통역 후기”에 실려 있습니다). 

영화제는 이 반복되는 문제를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통역 준비과정 전체를 농인 당사자와 함께 하기로 했죠. 벌써부터 단언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시도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여름, 코로나19 인권영화제의 라이브토크가 끝난 후 “한국에서 이런 수어통역은 본 적이 없다.”는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러한 협업과 연출 과정 덕분이었을 거예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무실 거실에서는 수어통역 촬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통역을 중단하고 한국어 단어를 수어로 어떻게 옮길지에 대해 논의하고, 촬영을 하는 도중에 영화에 몰입해버려 울기도 합니다. 이 길고 깊은 소통의 시간이 수어통역에 전부 담겨 있습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상영작에 삽입된 수어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