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나눠요] <퀴어의 방> 은용님께

[함께나눠요] <퀴어의 방> 은용님께

은용 님

저는 서울인권영화제에 있는 채영이라고 합니다. 2018년 23회 서울인권영화제에서 <퀴어의 방> 시놉시스를 쓴 적이 있습니다. 네, 거기서 은용 님을 알게 됐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세 번째 방’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낡은 소파와 책상들이 놓여 있는 거실, 티팟에 물을 따르던 손과 똑바른 글씨로 쓴 메모. 은용 님의 공간은 정갈했고 따뜻해 보였고 아늑해 보였습니다. 집안 곳곳에 있는 푸른색 풀들이 그 곳에 생명력이 넘치고 있음을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캐리어와 가방 하나, 쇼핑백 하나를 들고 가족과 살던 집을 나온 당신은 길 위에서 마침내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하던 은용 님의 목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당신은 동시에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편안한 것이 이상하다고. 불안하다고도 했습니다. 집이란 건 언젠가 사라질 텐데, 너무 정 들어서 떠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제 가슴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당신 목소리의 무게를 느꼈습니다. 내가 떠나온 집을 떠올렸고, 길 위에서 비로소 느낀 자유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 기쁘기도 슬프기도 했습니다.

사실 시놉시스를 쓰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때려치우고도 싶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한 줄로 요약하는 것도 어려운데, 네 사람의 삶이 담긴 네 개의 방을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하다니요. 수 차례 영화를 돌려보고 여러 번 나 자신이 싫어진 뒤에야 나의 시놉시스는 팀원들의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은용 님이 나온 <퀴어의 방>만큼 여러 번 본 영화는 이제껏 없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보고도 또 보고 싶고, 또 보면 다시 위로와 힘을 받는 영화도 없습니다.

 

그래서 3년 만에 들은 은용 님의 소식을 마주하기 싫었습니다.

 

지난 2월 9일 은용 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놀랐지만, 놀랍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은용 님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나 놀라고 속상해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트랜스젠더의 죽음이 놀랍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무뎌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 은용 님과 같은 결정을 한 이들의 소식을 듣습니다. 은용 님도 그랬겠지요. 끈질기게 찾아오는 아침과 지독하게도 다시 떠지는 눈을 원망한 날도 있었습니다. 은용 님의 아침도 그랬던 걸까요? 오늘 아침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이 편지를 쓸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을 갈무리하는데 딱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하루라도 더 살아남아야겠다.”

 

은용 님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마디 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을 하루라도 더 살아 보겠습니다. 차별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하나라도 더 나오도록, 사람을 짓밟는 편견의 시선이 하나라도 줄어들도록, 한 번이라도 더 누군가의 곁에 서서 ‘이런’ 세상에 맞서도록. 하루라도 더 살아남아 보겠습니다.

 

이 땅을 떠나 새로 지었을 은용 님의 방을 상상해 봅니다. 어떠한 죄책감도, 미안함도, 슬픔도, 고독함도 없는 그 세상을 상상해 봅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차를 마시고, 같이 낡은 소파에 드러누워 수다를 떨고, 다음 퀴어퍼레이드를 신나게 준비하는 은용 님을 상상해 봅니다. 방 앞에 당당히 ‘은용의 방’이라 문패를 붙였겠지요. 모두가 은용님을 ‘은용’이라 부르겠지요.

떠날 걱정 없이 아늑하고 편안한 집에서 오래도록 쉬는 은용 님을 상상해봅니다.

훗날, 제가 그곳에 가게 되었을 때 은용 님의 방에 초대 받으면 참 좋겠습니다. 따뜻한 찻잔을 두 손에 품고 사는 얘기 나누며 웃다가 해 지는 하늘을 같이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맞이할 그 날, 은용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앉을 수 있도록 잘 살아야겠어요. 은용 님이 그랬던 것처럼, <퀴어의 방>에 나온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대로 사는 이 세상의 ‘퀴어’가 되어 오늘도, 내일도 살아남아 보겠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채영 드림

 

*본 링크로 들어가면 영화 <퀴어의 방>에 나오는 은용님의 방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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