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태희의 편지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1/02/24
안녕하세요, 태희예요.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에서 지내던, 그 고양이 말이에요. 저는 요즘 채영이라는 상임활동가의 집에서 살고 있어요. 벌써 2개월이 넘었어요. 몸도 쑥 크고 짧고 굵던 꼬리도 길어져서 저한테 못생겼다고 놀리던 사람들이 다 놀라고 있어요.
[그림1. 태희가 의자에 앉아 있는 채영의 어깨 위에 올라 앉아서 정면을 보고 있다. 태희 엉덩이 뒤에 있는 채영의 얼굴은 기울어졌고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제집에는 온갖 장난감들이 있어요. 대부분 선물로 받은 것들이에요. 어떤 건 하나도 재미없고 어떤 건 매일 갖고 놀아도 재미있어요. 가끔 채영은 재미도 없는 장난감을 흔들면서 내 앞에서 몸을 막 움직이는데, 그럴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왜 사람들은 눈치가 이렇게 없는 걸까요.
가끔은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들어요. 가끔은 내 말을 다 무시해요. 채영 집사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금방 지치는 것 같아요. 나는 정말 멈추지 않고 놀 수 있는데 말이에요.
채영이 출근하면 집엔 나 혼자 남아요. 혼자 장난감을 갖고 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잠을 자요. 아주 심심하지만 어쩔 수 없죠. 저녁에 채영이 오면 많이 놀아달라고 떼를 써야지. 아무리 놀아도 제 성에 차지 않아요. 정말 답답해요!
[그림2. 흙에 놓인 유리판 위에서 기지개를 펴고 있는 태희의 모습. 엉덩이가 한껏 하늘을 향해 올라가 있고 앞다리는 쭉 펴져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에서 자라면서 제가 제일 많이 본 것은 컴퓨터 모니터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이에요. 저도 해보고 싶은데 제가 컴퓨터로 갈 때마다 사람들은 저를 치워내기 바쁜 거 있죠. 그래서 가끔 아예 키보드 위에 앉아서 메시지를 쓰곤 해요. ‘ㅂㅈ댜ㅕㄷ갸ㅐㄷ배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같은 거 말이에요.
요즘 날이 따뜻해져서 기분이 좋아요. 창틀에 앉아 밖을 보는 것이 최고의 낙이에요. 햇살 아래 앉아 있다 보면 눈이 스르르 절로 감겨요. 가끔 채영이 까먹고 창을 안 열어 놓고 가면 미워 죽겠어요. 그런 날은 일부러 더 채영의 발을 깨물곤 해요.
[그림3. 소파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태희.]
오늘도 채영은 출근을 했어요. 이따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피곤한 눈을 하고 돌아오겠죠. 아침과 낮은 너무 느리게 가는데 저녁 시간은 항상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려요.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그런가 봐요. 매일매일 종일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누가 옆에 있으면 잠을 자도 더 잘 자는 거 같아요.(채영이 잠만 자는 날은 싫어요)
여러분 곁에도 누군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