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편지] 나는 너를 통해 내가 된다 (3)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21/05/21
* 서울인권영화제의 상임활동가 채영과 후원활동가 윤석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지난 편지는 다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편지 http://hrffseoul.org/ko/article/3105
두 번째 편지 http://hrffseoul.org/ko/article/3109
채영의 편지
윤석,
<남궁인 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께> http://www.weeklymunhak.com/26/402/
주간 문학동네에 실린 이 글을 보았니? 오늘 같이 일하는 이가 알려주길래 찾아보게 되었어. 이슬아가 남궁인을 때렸다는 말에 난 정말 때린 줄 알고 에~~? 했는데 알고 보니 '글'로 때린 거였어.
호되게 맞았더라.
어제와 오늘, 상대와 주고받은 말이 뜻대로 전달되지 않은 일이 있었어. 그전에도 여러 번 있었을 테지만 어제와 오늘은 유난히 그 경험이 거슬리더라고. 오해의 원인을 찾아보았고 아주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그 실수는 내가 문자를 '내 입장'에서 적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거더라. 상대가 나와 같은 양의 정보를 숙지하고 있다는 '오해'에서 나온 말, 상대가 나의 고민의 맥락을 알고 있을 거라는 '오해'가 채택한 정보. 그렇게 만들어진 말을 받은 이의 '오해'에 주눅 들어 입을 다무는 나.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이니.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글을 읽고 나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너에게 쓰지 못한 답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 달 전에 쓴 첫 편지에서 제가 선생님께 말했지요. 수신자가 확실한 서간문에서는 어떤 발신자가 되실지 궁금하다고. 저는 이 연재가 꽤나 즐거웠습니다. 선생님도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글에서 수신자가 바로 저이기 때문에 쓰인 문장의 비율은 예상보다 적었다고 느껴집니다. 상대방에 대한 집중도로 따졌을 때보다 한참 미약하셨던 겁니다. 선생님은 주로 저에게 혼나시느라, 반성하시느라, 회상하시느라 바쁘셨지요. 그건 남궁인이 남궁인을 재발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슬아 역시 남궁인을 재발견하느라 참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남궁인이 이슬아를 얼마나 재발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남궁인 안에서 이슬아는 어떻게 새로워졌습니까? 이것은 부지런히 남궁인을 통과하고자 노력한 친구의 질문입니다."
글이 띄워진 창을 닫고 우리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열었어. 부끄러움에 심장이 시큰거렸다면 이해해줄까?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나'로 가득한 내 편지와 그로 인해 한 치도 가까워지지 못했던 너의 이야기가 보였어.
몽매하게도 너를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너와 내가 만나게 된 계기가 '김상봉 철학'이었다는 게 재밌구나. 그땐 같이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르시시즘을 발견할 줄만 알았지 내 안의 나르시시즘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너를 통해 내가 된다.'는 말을 써왔지만 윤석, 너와 보낸 그 많은 시간 안에서 너를 통과하는 순간을 겪어봤다고 자신할 수 없을 것 같아.
사실 편지를 요청했을 때, 너에게 가진 질문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 싶어. 그저 연결이 필요했을 뿐.
'활동가'라는 칭호가 낯설고 모든 행동에 조심스러운 이 초짜 활동가를 꾸며 줄 배지를 찾고 있던 건인지도 몰라. 솔직한 심정은 '활동가' 안 하고 그냥 도망치고 싶어. '활동가'라는 이름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그에 비해 넌, 네 말과 달리 괜찮은 활동가이자 성실한 학자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그런 너를 통해 나를 보이고 싶었고 서울인권영화제라는 단체를 통해 너에게 나를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멋들어진 활동가 친구의 유려한 말과 함께 서면 좀처럼 가려지지 않는 미천한 내면과 미흡한 정서가 가려질까도 싶었다.
그렇게 나를 채우느라 네가 보내고 있을 바쁜 나날을 상상해보지 못했고 PPT 창 네 개를 띄운 채로 메일을 쓰는 네 상태를 가늠해보지 못했어. 솔직히 말하면 꼬인 마음에 이런 생각을 했지. '그렇게 바삐 살아서 뭐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