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월 26일 수요일 2009 하반기 영화제 정기회의 시작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09/11/02
영화제 소식
인권영화 다시보기
기획의도
에서 제주의 3다(三多, 石多·風多·女多)는 또 다른 3다로 바뀐다. 죽음과 피와 눈물(屍多·血多·淚多)이 그것이다. 48년 4.3 이후의 일이다. 해방 후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혼돈정국의 강압적 폭력에서 촉발된 4.3은 현대사에서 정치·이념·전쟁 등의 거대한 힘이 어디까지 민중을 억압하고 학살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상징'은 말 그대로 수많은 하위개념을 대표하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 권력과 지배의 이데올로기가 민중의 삶을 철저히 배반하고 탄압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비극의 역사, 억압의 역사를 안다면 그들의 본능적 파토스를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지배계층의 안위와 정당성 획득을 위해 무고한 수만의 인명을 살상하며 합리화의 이유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것은 얼마나 가증스럽고 끔찍하고 유치한 일인가. 맑스의 말처럼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4.3이 말해주는 것은 '한시대의 비극'이 아니다. 4·19와 광주, 87년 6월이 나타내는, 그리고 촛불과 이 시대의 탄압으로 연결되는 계속되는 비극이다. 쓰러진 우리 모두의 얼굴에서 우익에서 수구로, 독재에서 자본으로 이름만 달리한 가해의 발자국을 찾을 수 있다. 용산에서 평택에서 그리고 빼앗긴 자들 모두의 가슴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구조적 비극을 우리는 이제 끊어내려고 한다. 를 시작으로 우리의 기획이 뫼비우스의 띠를 끊는 예리한 칼날이 되었으면 한다.
작품소개
조성봉/1997/다큐/67분 (2회 인권영화제 상영작)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이 발견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제주도의 모든 것은 아니다. 주의 깊거나 운이 좋은 여행자는 학살현장, 헛묘와 같은 비극적인 제주 4.3항쟁의 흔적들을 이 바람 많은 섬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미 50년 가까이 경과하였지만 1948년에 일어난 제주 4.3항쟁의 전모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고, 진실이 아직도 매장되어 있다는 서글픈 현실이 부산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는 하늬영상으로 하여금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했다.
1992년 북제주군에서 발견된 다랑쉬굴의 희생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오래된 과거이자 여전히 억압받는 기억인 제주 4.3항쟁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하여 미군정보고서, 당시의 신문보도, 연구자들의 학술적 설명, 목격자의 인터뷰, 자료화면 등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생존한 노인들의 여전히 생생한 회상이 주는 질감이나 미군정보고서의 적절한 인용이 주는 객관성은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그 진실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뿐만 아니라 당시에 작용하였던 사회적 관계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에서 아직도 진행 중인 제주 4.3항쟁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시각을 새롭게 해 줄 것이다.
배경설명
4·3 사건의 개요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함.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536쪽)
생존자증언
제주시 동부 8리에서 일어난 학살을 당시 여덟 살로 겪은 부원경 씨는 당시 마을의 암울했던 상황을 [제주의 마을·봉개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총소리만 들리면 밥상 머리에 앉았다가도, 밭을 갈다가도, 타작을 하다가도, 동쪽에서 들리면 서쪽으로, 서쪽에서 들리면 동쪽으로 밥그릇을 팽개쳐 두고, 재기를 팽개쳐 두고, 도깨를 팽개쳐두고 슛겨다니던 아버지와 형님들을 기억한다. 낮에는 아래쪽에서 총을 겨누면 아버지와 형님들은 조가 없노라고, 살려달라고 손을 부비고, 밤에는 위쪽에서 총을 겨누면 똑같이 아버지와 형님은 손을 부볐다. 젊은 어머님과 누나 또한 가련한 눈빛으로 손을 부볐다. 밤에는 반동 분자로 몰리고 낮에는 빨갱이로 몰리고....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푸른 제목에 푸른 철모를 쓴 사람들이 긴대빗자루에 불을 붙이고는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그러자 온 마을 이 불길에 휩싸였다. 우리집 사랑채와 별채, 외양간도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그날 밤은 왜 그리고 춥던지. 아버지와 어머님은 우리들을 꼭 품에 껴안고 울타리 밑에서 밤을 새웠다. 그때 땀냄새인지 다른 무슨 냄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의 그 품 냄새를 떠올릴 때 내 지금의 불효가 가슴 쓰리다."
4·3의 어제와 오늘
한동안 4·3은 누구도 말해선 안 되는 사건이었다. 4·19 혁명 직후 겨우 일기 시작한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 발생한 5·16 군사 정변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4·3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옥고를 치렀고, 4·3에 관한 글은 판금되거나 필화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군부독재정권은 4·3을 은폐 왜곡했고 철저히 금기시 했다. 그에 따라 오랜 기간 제주도민들은 4·3을 입에 담지도 못했고 심한 허무주의와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에 시달려야만 했다.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서부터 '폭도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장래가 막혔다. 깡그리 불태워져 잿더미가 된 마을로 돌아온 후 굶주림에 벗어나기 위해 맨손으로 척박한 땅을 일구며 몸부림쳤던 것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고립무원의 섬에서 발생한 이 처절한 학살극에 대해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교과서는 왜곡된 내용만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며 언론도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해왔을 뿐이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형성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에 비로소 진상규명운동이 다시 시작됐고, 이로써 일부나마 겨우 국민의 관심을 얻게 됐으니, 도민들에게 그간의 세월은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40년'이었다. 1989년 제민일보 4·3 취재반의 4·3 기획연재 및 제주4·3 연구소의 발족은 4·3 진상규명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이는 그간의 논의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던 수준에 비해 직접 조사 활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93년 제주도의회에 '4·3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피해자 신고작업을 시작했으며, 1997년에는 각계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제주 4·3사건 제 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가 발족되었고, 2000년 1월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었다.
리뷰
비극을 잊지 않고 바라보기
제주도는 국내 최고의 관광지이다. 화산지형이 주는 이국적 풍경, 육지와는 다른 문화가 주는 정취,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다는 그 섬. 예전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 와서 제주도는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느꼈고, 나중에 제대로 한라산도 올라가보고 해안가도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제주 4.3 사건은 나에게 글자로 기억된다.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 교과서 뒷부분에 잠시 언급되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일제시대 이후의 근현대사는 별로 '안 중요해서' 시험에 잘 안 나온다고 했었다. '제주 4.3 사건은 반공주의 분위기 속에서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었다'는 정도가 기억나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교과서 속의 문장일 뿐이었고 별 감흥도 없었다.
는 '전설의 그 영화'이다. 올해 처음 인권영화제와 인연을 맺은 나도 예전에 어디선가 그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할 당시 논란이 되었던 영화라(*박스 기사 참조) 아주 유명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꼭 한 번 보고 싶긴 한데 10년 전 영화를 이제야 보다니 좀 뒷북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70분의 상영시간이 흘러간 뒤에는 좀처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하긴, 어느 인권영화가 예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서 지금 의미가 없겠는가.
비극을 직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솔직히 그분들의 입에서 담담한 듯 흘러나오는 끔찍한 이야기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자칫하면 나도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댈까 두려워 애써 태연하려 했다. 게다가 이건 너무 끔찍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비겁하지만 그 증언들을 '남의 이야기' 듣듯이 한 귀로 흘려 외면하고 싶었다. 마치 공포영화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 안도할 수 있는 것처럼 영화가 다 끝나면 잊고 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가 다 끝나고 내가 돌아온 현실은 영화 속 현실과 동떨어진 곳, 마음 편히 안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었다. 사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었던 분들의 분노와 체념과 고통이 묻어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의문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 할머니는 그 때 이야기를 해서 뭐하느냐고 반문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영화 속의 한 할머니는 당시 사건을 '요즘은 가끔 그 때 일을 잊는다'고 말한다. 50년이라는 세월이 그분들을 이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한날에 가족들을 다 잃고, 부모님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고, 구덩이를 가득 메운 시신 중에 동생의 시신을 찾을 수 없어 6년이 지나서야 대충 뼈를 추려야 했던 경험을 시간이 풀어줄 수 있는 것일까. 그 경험을 대체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진부한 질문인 것도 같지만,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미 나이가 많으신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역사에서 잊혀지는 것인가.
한국은 참으로 많은 누군가의 무고한 피와 학살 위에 세워져야 했다. 4.3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는지. 한국 사회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 가난하고 힘이 없어 귀찮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을 그 이름 아래 놓고 논란을 잠재우며 지금까지 왔던 것이다. 누군가의 피로 다져진 역사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지금 살아가는 우리의 원죄이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 그분들은 가끔 잊을 수 있어야겠지만 우리는 항상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일 것이다.
p.s. 그러고 보니 요즘 제주도에는 주민들의 반대 끝에 해군기지가 들어서기로 결정되었고, 이에 도지사의 주민소환절차가 진행 중이다. 평화를 향한 제주도 사람들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제2회 인권영화제(97년 9월 27일-10월 3일, 홍익대학교)와 상영작 관련 탄압 일지
9월 27일
경찰과 홍대 당국 개막식장 봉쇄, 이에 야외에서 개막식 강행. 개막작 상영 중 학교 측이 전원공급 차단, 이에 발전기를 가동해 영화제 계속. 이후 매일 전원이 차단된 상황에서 발전기를 돌리거나 쌀쌀한 날씨에도 야외 콘크리트 계단에서 영화상영. 학교 주변에선 경찰의 불심검문이 계속됨.
10월 1일
경찰 새벽 1시 45분경 홍대 압수수색, 당시 총학생회 간부 2명 연행.
10월 2일
경찰 발전기 압수, 국제엠네스티는 "정부의 조치는 인권영화제의 탄압이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반정부적인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한 시도"라는 내용의 성명 발표.
10월 3일
영화제 조기 폐막. 경찰이 홍대 총학생회 간부들에게 영화제 조기종결을 조건으로 조사 불가를 고려하겠다고 함. 이에 고민하는 학생들의 입장을 고려해 인권영화제측은 조기 폐막 선언.
10월 6~9일
명동성당 입구에서 당국의 영화제 탄압에 항의하는 야간 '거리상영'.
10월 17~19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당국의 탄압으로 영화제에 오지 못한 시민들을 위해 '연장상영'.
10월 23일
인천영화제 개막을 시작으로 각 지역에서 인권영화제에 대한 탄압 이어짐. 상영장 단전과 봉쇄, 관계자 연행 및 경찰 출석 요구 등으로 상영중지와 조기 폐막이 강요됨.
11월 4일
서준식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전격체포, 인권운동사랑방 압수수색.
11월 5일
서준식 집행위원장 영장실질심사 없이 구속.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인권영화제를 개최해 등을 상영한 것에 대해 음비법, 국보법, 기부금품모집법 및 보안관찰법 위반 등이 적용됨.
11월 13일
서준식 무죄석방 공동대책위원회 발족. 이적표현물로 시비된 전국동시다발 상영돌입. 이적성 규정에 맞서 영화과 교수, 현대사학자, 법학자 등 전문가 의견 개진 운동 시작.
11월 28일
서준식 집행위원장 기소.
12월 30일
서준식 집행위원장 첫 공판.
98년
2월 5일
서준식 집행위원장 보석으로 석방.
2월 22일
98 베를린 국제 영화제 영포럼 부문 상영.
자원활동가 편지
미래 자원활동가에게
전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자원활동을 시작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하고 많은 인권운동사랑방 내의 자원활동 중에서 왜 하필 영화제였는지는 더더욱 모르죠.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동네 마실 나가듯 이곳에 온 것은 아니란 것이죠.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곳으로 오기에는 저 놈의 언덕길은 높기만 하거든요. 늘 오르는 언덕길일지라도 매번 숨이 차서 헐떡거리죠. 그리고 무슨 회의는 그리 긴지 마치기로 한 시간은 벌써 지냈는데 한 번 시작한 회의는 끝날 줄을 몰라요. 어서 회의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애꿎은 펜만 돌립니다. 겨우겨우 회의가 끝나면 이제 집으로 가서 편안하게 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이에요. 우리는 언제나 뒤풀이를 사수하거든요. 뒤풀이가 없는 회의란 상상할 수 없어요. 그 동안 영화제팀이 뒤풀이를 하면서 먹었던 안주는 몇 그릇이며 마셨던 술이 몇 병을 공터에 쌓기 시작한다면 순식간에 산 하나가 만들어질 겁니다. 그 정도로 먹고 마셨습니다.
여기까지 편지를 읽고 나면 미래 자원활동가는 분개할 것 같습니다. 아니, 어째서 '인권영화'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걸고 가열차게 투쟁해도 모자랄 판에 한가하게 뒤풀이를 일삼다니. 이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인권운동사랑방 대문을 박차가 나가려고 하는 당신을 붙잡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 광장을 본 적이 있나요."
저는 봤습니다.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사이에서 무수히 범람하는 이질적인 흐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모습을. 저는 들었습니다. 영화 한 편으로 말미암아 그걸 보는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웅성거림을. 그리고 당신께 말할 것입니다. 우리 같이 광장을 거닐어 보자고 말이죠.
뒤풀이는 우리에게 작은 광장이었습니다. 삶을 즐기고 행복할 줄 아는 이들이 만드는 작은 광장은 우리를 듣게 하고, 말하게 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지나갔던 이야기는 우리의 입을 타고 흐르자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또한 알게 됩니다. 그 목소리 없는 자들 중에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권영화제에서 자원활동을 하게 될 당신이 당위에 얽매여서 경직된 자세로 돌진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책상머리에나 앉아서 인권이니 운동이니 읊조리며 젠체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뒤풀이를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먹고 마시며 우리 사는 이야기를 해봐요. 그게 인권의 시작일 테니까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오게 될 당신께 이 글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