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영화제 뉴스레터 울림 93호] 인권영화제 15주년 - 하라HARA 파티에서 만나요!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0/01/28
영화제 소식
인권영화제 15주년 - 하라HARA 파티에서 만나요!
'하라HARA 파티'가 이번주로 다가왔습니다! 하라HARA 파티는1월 29일 금요일 오키도키(동양빌딩 지하/시청역 10번 출구)에서 열립니다. 본 행사는 9시 20분부터 시작하며, 5시 20분부터 파티장 안에 마련된 작은 인권영화관에서 를 상영합니다. 그동안 인권영화제와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앞으로 '표현의 자유'를 위해 힘차게 나아가기 위한 여러분의 지지와 열망을 모으고자 합니다. 인권영화제를 향한 관심과 아낌없는 조언 부탁드립니다.
영진위의 인권영화제 지원거부 취소 행정소송 제기 기자회견
1월 28일 목요일 오전 11시, 청량리 영화진흥위원회 앞
인권영화제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위법한 선정거부처분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합니다. 1월 28일 목요일 오전 11시, 청량리 영화진흥위원회 앞에서 행정소송 제기 기자회견을 열 예정입니다.
영진위 측은 2009년 영화단체사업지원 사업최종심사를 하는 시기에 인권운동사랑방으로 전화를 걸어, 심사기준과는 무관한 촛불집회 참석 여부 등을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인권운동사랑방과 인디포럼은 위 사업의 최종심사 결과와 심사 기준 등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습니다. 영진위는 정보공개 내용에서 "2009년 영화단체사업지원 사업에 탈락한(또는 보류 중인)단체 심사결과 사유 7.14 결정이 보류된 일부사업(인권운동사랑방 포함)에 대해서는 위원회에서「09년도 예산 및 기금운영계획집행지침」이행여부 및 「민간경상보조사업에 대한 감사원 감사」등의 사유로 인해 차후 재심의하기로 결정하여 이에 따른 위원회 재심의가 지난 12월 21일 있었으며, 심의결과 금년도 사업에 대해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영진위가 공적 기금을 이용하여 현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단체들을 길들이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 및 사상의 자유를 위한 인권영화제의 싸움에 많은 지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후원활동가 인터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들을 영화로 만날 수 있는 곳
후원활동가 류현영 님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자기소개'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 짧게 말씀드리자면, 일상이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출판노동자입니다.
후원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지난 2009년 청계광장 인권영화제 때부터 하게 되었네요. 딱히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인권영화제를 포기하지 않고 청계광장에서 개최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뭔가 보탬이 되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제 주변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스탭들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했고, 해를 거듭할수록 인권영화제를 지속하기가 더 힘들어질 텐데, 최소한의 힘이나마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기억에 남는 인권영화제 상영작은 무엇인가요? 기억에 남는 이유는요?
'칠레전투'를 꼽아야 할 것 같네요. 이 작품을 본 지 벌써 십 년도 더 되었는데, 여전히 '인권영화제' 하면 이 영화가 떠오르네요.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해요. 이유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어두운 영화관에서 울음을 참느라 목구멍의 통증을 감내해야 했던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칠레전투'를 보고 나서 '선거를 통한 혁명', 철옹성 같은 보수 진영의 반격, 혁명 이후 경제 문제, 혁명 실패 뒤에 찾아오는 더 지독한 독재와 억압 등등에 대해 많이 고민했던 것 같네요. 이는 여전한 나의 문제의식이기도 하고요.
관심 있는 인권사안이 있나요?
인권 사안에야 모두 관심이 있죠. 장애인, 아동․청소년, 이주노동자, 하청노동자, 비정규직, 노숙자, 철거민, 그리고 여성 등등. 하지만 부끄럽게도 관심 이상의 실천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 어떤 얘기를 구체적으로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꾸준히 관심의 끈은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인권영화제 후원 활동에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딱히 의미를 두고 있진 않습니다. 꼭 의미 부여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자연스럽게 마음 가는 대로 하게 된 활동입니다. 어디에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를 별로 즐기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인권영화제 또는 울림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지난해 인권영화제 상영작들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새롭게 접했습니다. 어쩌면 인권영화제 상영작을 작년만큼 열심히 챙겨서 본 경우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요. 지금 내가 있는 공간 안에서만 맴돌다보면 전혀 알 수 없을 많은 이야기들을, 그러나 알아야 할 이야기들을 인권영화제를 통해 접하게 된 것이지요. 아마도 그것이 인권영화제의 역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도 인권영화제의 취지에 맞는 영화들을 매년 꾸준히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후원활동가께서 바라는 세상의 모습은?
질문이 추상적이니 대답도 추상적으로 해도 되겠지요? 누구도 억압하지 않고, 누구도 억압받지 않는 세상. 누구도 착취하지 않고,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는 세상. 누구도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않고, 누구도 어이없이 손가락질당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권영화 다시보기
: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알베르 카뮈는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의 삶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에 빗대어 부조리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결국엔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거운 돌을 높은 산 정상으로 올려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시시포스의 삶은, 그와 동일하게 인생이란 무게를 짊어지고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는 인간의 고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역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꿈꿨으나 누군가는 자신의 통제 하에 움직이는 세계를 꿈꿨다. 이에 맞서 이성과 도덕의 힘으로 평화를 외친 이들도 있었으나 물질과 권력을 앞세워 폭력으로 잠재운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이상과 현실이 교차하고,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고 있는 역사는 시시포스의 그것처럼 부조리하다.
러닝타임 268분의 대작 '칠레 전투'는 이러한 비극의 역사의 한복판에 있는 칠레의 모습을 기록한 작품이다. '부르주아의 봉기', '쿠데타', '민중 봉기'의 3부작으로 되어 있는 영화는 사회주의 정부를 세워 노동자와 서민의 나라로 향하려 했던 아옌데 정권의 몰락을 그린다. 1부에서는 각각 정파들의 입장을 적절히 분배하여 배치하고, 2부에서는 아옌데가 미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우파 정권의 쿠데타로 죽음을 맞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선 연대를 통해 평등한 세상을 꿈꿔보려는 노동자들의 노력을 그리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영화가 제시한 이상과는 반대로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결국엔 민중이 아닌 자본이 이겼으며 시민이 아닌 군인들이 권력을 잡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엔 수많은 사회적 손실이 있었다. 나라는 양쪽으로 분열되어 소모적인 논쟁이 지속되고 더 이상 결론을 도출할 수 없는 상태로 두 극을 향해 치달았다. 그 속에서 고통 받는 건 죄 없는 시민들, 각 개인이었다. 부르주아지에 동의하는 중산층도 권력의 선동에 휘말린 우파 시민들도 그리고 노동자의 나라를 건설하려던 평범한 서민들도 모두가 무기력한 피해자였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은 누구나 같을진대, 결과는 철저한 반목과 대립이었던 것이다. 가해자들은 이념을 악용하고 조장하는 무리들이었다. 자본과 권력을 획득하려는 목적을 정치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제국주의의 야망을 펼치려는 이들. 세속적인 욕심으로 채워진 그들은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가 시민들의 삶을 서서히 부식시키고 갉아 들어갔다. 강력한 무기와 자본을 거머쥔 제국주의자와 그에 동조하는 독재자 앞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무기력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던 이유는 '역사는 민중이 만들어간다'는 아옌데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예부터 외쳐온 인간의 이성과 도덕이 물질과 자본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모순을 보았음에도 절망할 수 없었던 것은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많은 이들이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부조리는 이들의 소망을 다시 이상과 현실의 순환 속에 몰아넣는다. 지금까지도 세계는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로 구분된다. 영화의 칠레도, 바다 건너 아프리카도, 그리고 이 나라 한국도 서로 다른 형태의 부조리로 신음하고 있다. 이렇듯 빠져나갈 곳이 없을 것만 같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다시 한 번 물을 필요가 있다.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꿈을 꿀 것인가? 참고로 앞에서 언급한 부조리의 철학자 카뮈는, 레지스탕스였다.
자원활동가 편지
문을 열고, 온 세계를 향해
언젠가 자원활동가의 편지를 쓰게 된다면 어떤 말들을 쓰면 좋을까, 하고 혼자서 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중에는 몇 단어만 던져진 채 더 이상 쓰지 못한 이야기도 있고, 반대로 너무 장황해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도 있답니다. 그래서 그냥 다시 마음을 달리 먹었지요. 솔직하고 편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이 편지에 담자고요. 나와 지금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 저 멀리에서 이 편지를 읽을 사람들, 언젠가는 만날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요.
2009년 여름, 사랑방에 처음으로 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조금은 낯선 풍경들이 나를 맞이했지만 내 안에는 이곳에 꼭 와야겠다는, 이곳을 내 삶 속에 품겠다는 어떤 '의지' 같은 것이 고집스레 버티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곳이 정말 내 삶에 들어오기까지 그 의지는 조금 더 자라야만 했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있는 인권영화제 회의에 오는 날이면 아직은 내 곁을 맴도는 낯설음을 이겨 내려 애써야만 했지요. 원체 소극적인 성격이라 더했을 거예요. 지금도 직장에 다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한 발자국 물러서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정말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곤 합니다. '자원활동가'라는 이름이 어색해 괜히 마음속으로 가만히 불러 보기도 하지요.
그래도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 그것은 세상에 나오고 싶다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이었을 겁니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나는 늘 방관하며 내 안에만 갇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던 어떤 죄책감을 이겨 내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지금도 나는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진 것이 아닐까 고민합니다. 또한,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언젠가 인권영화제는 내게 '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나오면, 나와 함께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지요. 다만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니 이전보다 사는 게 조금 더 불편합니다. 부당한 이유로 해야만 하는 것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지요. 가령 누군가를 부를 때 이름에 호칭을 붙이지 않고 부르는 것은 이곳에서 한 발짝만 나서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인권영화제와 함께하고 있는 지금, 나는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살기 시작했다고 느낍니다. 이 생명력이 혼자의 것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도록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불가능해서 의미 없으리라 생각한 일들을,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끊임없이 해 나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을 열고, 모든 존재들과 아무런 편견도 미움도 없이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온 세계를 공유할 수 있을 때까지.
자원활동가 출동
용산은 시대를 흐른다
1월 8일 용산 장례식과 1월 20일 참사 1주기 추모 문화제를 다녀와서
장면 하나. 용산 철거민 참사 장례식
젊은 기자는 철거촌을 취재한다. 철거민 네 식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데 용역들이 벽을 부순다. 가족의 마지막 식사자리를 지켜주기에는 벽이 너무 얇았다. 가장의 주름에 먼지가 내려안는다. 취재를 마친 기자는 그 길로 노트와 펜을 사서 떨리는 손으로 적어 내려간다. 을. 그리고 35년이 지났다.
또 그렇게 355일이 지났다. 다시 겨울이 오고 해가 지나서야 열사들은 용산으로 돌아왔다. 가족들과 삶을 꾸리던 그곳에 처참한 주검이 되어 졸아왔다. 낮 12시 서울역에서 영결식이 진행될 무렵부터 눈이 내렸다. 켜켜이 쌓인 한(恨)이 일 년을 싸우다 눈으로 내렸다.
살을 에는 영하권의 날씨였다. 만장을 들고 행진하며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 날의 절규와 1년간의 눈물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여밀 수 없었다. 맨몸으로 슬픔을 오롯이 느껴야 했다.
사람들은 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다. '독재타도 명박퇴진', '살인경찰 물러나라', '철거민은 무죄다 구속자를 석방하라!' 카페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교통체증을 염려했고 경찰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상관의 지령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장례식에 함께한 시민들의 슬픔과 분노는 그날의 남일당 불길처럼 뜨거웠다.
낮 12시 서울역에서 영결식을 엄수하고 3시에 용산 현장에서 노제를 진행하려 했지만 두시간여 지연된 다섯시 경에야 용산에 도착했다. 수많은 인파가 움직였고 경찰이 교통통제를 제대로 하지 않은 까닭이다. 함께한 사람들은 차선 하나라도 더 점거하려 했고 경찰은 막아섰다. 우리의 인권은, 차선 하나만큼 얻어내기 힘들었다. 무장한 전투경찰들이 두텁게 사람들을 에워쌌다. 경찰 방송차는 "여러분들 때문에 수많은 시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질서 있게 행사에 임해주시기 바랍니다"며 떠들어댔다. 그들에게 우리는 대한민국 시민이 아니다. 철거민, 장애인, 노숙인, 빈민. 자본과 권력에 의해 소외된 우리는 시민이 아닌 귀찮은 철거의 대상이다.
기륭전자 장기 투쟁 중인 김소연씨의 사회로 노제가 진행됐다. 조시(弔詩)와 조가(弔歌)가 메아리쳤고 사람들은 엄숙했다. 용산의 넋에 저마다의 슬픔을 곱씹느라 박수조차 조심스러웠다. 일년동안 유가족들과 함께 고생하며 싸워오신 문정현 신부님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시대를 성토했다. 높은 이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그 음성은 단순한 분노가 아닌 차라리 초혼(招魂)에 가까웠다.
"남편이 이제야 용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새까맣게 탄 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몸뚱이로 왔습니다. 아이가 말합니다. 아빠가 너무 작아.... 얼마나 뜨거웠을 지를 생각하니 결코 화장은 할 수 없었습니다." 말 사이의 침묵은 울음을 참는 아픔이다. 겨우 말을 잇는 유가족분들의 말씀에 사람들은 숨이 막혔다. 거세진 눈발이 대신 흐느끼고 있었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시민들에게 머리 숙이는 유가족분들의 사례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나를 떨게했다.
깊은 어둠이었다. 남일당 앞에서 어둠을 조금 몰아내고 슬픔과 희망을 함께 느끼던 사람들이 흩어진다. 거짓말처럼 눈이 그치고 차들이 다시 용산거리를 누빈다. 가슴에 매단 근조리본은 아무도 떼지 않았다. 오늘의 슬픔도 시대에 대한 각성도 작은 희망도 저마다의 가슴에 안겨있었다.
장면 둘. 용산참사 1주기 추모 문화제
사람들 입김이 모여 하루 종일 안개 자욱한 날씨였다. 비는 온종일 흩뿌리다 그치다를 반복했다. 시대의 아픔을 관통하는 참사가 있은 지 꼭 1년 되는 날이었다. 용산 철거민 참사 1주기를 맞아 다시 용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열흘 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장례식만큼은 아니어도 수많은 인파의 열띤 목소리를 기대했다. 잊지 말자며 가슴마다 새기던 사람들의 약속을 믿었다.
현장에 도착해서 조금 당황했다. 사람들은 어림 삼백여명 정도 모였고 전경버스도 기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발언자의 음성과 군중의 함성도 장례식과는 사뭇 달랐다. 장례식이 낮은 음을 내는 현악기 소리처럼 끊김 없는 묵직함이 먹먹하게 가슴을 울렸다면 1주기 행사는 조촐한 뒤풀이 자리처럼 지난날을 회고하고 정리하는 소소한 웃음이 있었다. 장례식처럼 울음이 터질 듯 침통한 얼굴은 없었다. 저마다 요령껏 비를 피하며 자신을 웃게 할 농담을 기다리는 어둡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다른 날도 아닌 용산참사 1주기인데 적은 인파에 실망했다. 이제 이곳엔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싸움의 흔적은 한줌 먼지로 사라질 텐데 벌써 다들 잊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열흘 전 함께했던 거리의 타인이 그리웠다.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부르던 노래를 2010년 겨울 용산에서 부르게 될까 겁이 났다.
흉물스러운 남일당 건물에 영상이 비치고 있었다. 깨진 창문과 그을린 벽돌이 그대로 스크린이 되었다. 지난 1년을 되새기는 영상이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깨달았다. 용산 추모에 함께하는 인파가 많고 적음이, 언론의 관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다. 2010년 1월 현재 재개발 진행은 서울에서만 326건에 이른다. (재개발 136, 뉴타운 113, 재개발 예정구역 77) 올 한해에 서울시 주택 5만여 채가 철거될 예정이다. 용산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서민의 삶은 여전히 자본권력에 짓밟히고 있고 합법적 유사 독재 체제에 국민은 신음한다. 1주기 행사에 함께 한 사람들이 비통한 표정을 짓지 않는 건 슬픔의 희망적 변주이자 앞으로 투쟁에 대한 결의다. 겨우 장례식만 치렀을 뿐 희생자의 아들은 감옥으로 돌아가고 범대위 투쟁을 주도한 3명은 구속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처절한 싸움이다.
함께하지 못한 이들에게 벌써 잊었냐며 실망할 것이 아니다. 주거권, 생존권이라는 화두는 모든 사람의 문제다.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일당 건물이 사라진다 해서 도시빈민의 문제까지 철거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권력에 저항하는 시민의 힘을 믿어야한다.
탐욕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이제 만장을 태운다. 사람들은 보쌈김치를 먹으며 막걸리를 들이킨다. 적당히 적시는 비가 식욕을 돋운다. 흡사 농무를 끝낸 농악대 같다. 만장은 재만 남긴 채 나비처럼 하늘을 향한다. 남일당 망루 있던 곳을 한번 돌고 그동안 함께 한 사람들의 작은 자축연을 한참 바라본다. 비로소 비를 뚫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렇게 용산은 시대를 흐른다. 난장이들은 여전히 공을 쏘아 올린다.
*사진 출처: 용산 철거민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http://mbout.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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