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영화제 뉴스레터 울림 94호] '하라파티'가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0/02/26
영화제 소식
'하라파티'가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인권영화제 15주년 첫 후원의 밤 '하라파티'는 인권영화제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함께한 자리였습니다. 파티를 주최한 활동가들과 손님들이 한데 어우러져 인권영화제 '하라'를 외쳤습니다.
파티장에 마련한 인권영화관에서 상영된 '칠레전투'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습니다. 총 4시간 30분여에 이르는 대작을 보려고 찾아주신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본 공연에서는 인권영화제 15주년을 기념하는 영상이 상영되었고 '꽃다지'의 축하공연도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함께 노래 부르고 즐기며 인권영화제가 역경에 굴하지 않고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하라파티'에서 얻은 성원과 지지를 늘 가슴에 새기며 다시 한 번 박차고 나아가는 인권영화제가 되겠습니다.
14회 영화제를 만들어갈 자원활동가들의 만남
지난 2월 12일 14회 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모집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2월 23일 저녁 7시, 자원활동가 전체 오리엔테이션을 열었습니다. 이미 활동하고 있던 자원활동가들과, 새로 인권영화제에 몸담게 된 20여명의 자원활동가들이 만나서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2시간에 걸친 오리엔테이션 동안 인권영화제 정신, 역사, 현재 상황을 공유하였고, 영화제 활동과 진행과정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습니다. 인권영화제의 정신과 원칙에 공감하는 자원활동가들의 힘찬 활동을 기대합니다.
후원활동가 인터뷰
수많은 삶을 만나게 한 인권영화제
후원활동가 박은혜 님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연구공간 L(commonblogl.net)에서 활동하고 있는 은혜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
후원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인권영화제를 알게 된 건 오래됐지만 정기후원은 13회부터 시작했어요. 작년엔 개최 자체가 엄청난 투쟁이었죠. 이전에는 한걸음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좀더 적극적으로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최소한의,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연대하게 된 거죠.
기억에 남는 인권영화제 상영작은 무엇인가요? 기억에 남는 이유는요?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작년에 본 라는 다큐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콜텍, 하이텍 노동자들이 양화대교 북단에서 고공농성을 했었는데 제가 그 동네에 살거든요.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고 갔는데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유인물만 챙겨왔던 기억이 나요. 개인적인 기억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큐의 구성이 아주 좋았어요. 공장노동자들과 인디음악인들의 인터뷰를 교차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인상적이었죠. 악기를 생산하는 사람들과 그 악기를 통해 음악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마주침. 오늘날 '가치'란 무엇인지, '생산'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어요.
관심 있는 인권사안이 있나요?
어느 것 하나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는데요. 굳이 한 단어를 선택한다면 '접근권'이에요. 그건 정보에 대한 접근일 수도 있고, 물리적인 공간에 대한 접근일 수도 있죠. 그런 의미에서 인권영화제는 접근권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해줬어요. 표를 끊어서 좌석을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접근'의 방식이요. 청계광장을 활짝 연 건 말할 것도 없구요. ^-^
스스로의 인권영화제 후원 활동에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저는 인권영화제를 통해 수많은 삶을 만났고, 그 만남이 제게 끼친 영향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어요. 후원은 그 만남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이에요. 삶 속에서, 삶을 위해, 삶 자체로 저항하는 사람들과 그 삶을 영화로 만드는 작가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유통시키는 활동가들 옆에 서겠다는 의지죠.
인권영화제 또는 울림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그저 즐겁게 활동해주시길 바랄 뿐이에요. ^-^ 인권영화제가 영화제를 찾는 사람들과 영화제를 준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활력소가 되길 바랍니다.
후원활동가께서 바라는 세상의 모습은?
모두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해요. '제멋대로'가 아니라, 권력의 개입 없이 우리 스스로가 조율하고 협력하고 결정하는 거요. 그래서 인권이라는 단어가 '최소한의 인권'과 같이 기만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 창조하는 힘으로 충만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자원활동가 편지
가장 괴로웠던 순간에 찾아온 따뜻한 온기
새로운 일을 하고 싶고 이왕이면 인권과 관련된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작은 생각에서 찾았던 첫 발걸음이 벌써 작년을 이어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저를 인권영화제로 오게 했고 벗어날 수 없게 했을까요?
대학에 오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었었습니다. 나에게 작은 것 하나라도 주는 사람들은 항상 그와 같은 크기의 것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아무것도 줄 수 없으면 다가오기를 꺼려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나이가 비슷하면 모두 친구였는데 이제는 나이가 비슷해도 친구가 되기 쉽지 않아졌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차츰 사라져갔습니다. 인류는 진보해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체는 늘어났는데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인권영화제는 제가 가장 괴로웠던 순간에 찾아온 따뜻한 온기였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다는 거짓말로 치장하여 자신이 꽤나 따뜻한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때로는 달고 때로는 쓴, 하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한 해 사랑방은 제게 작은 도피처였습니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낯을 좀 가리는 저는 처음에 영화제에 오기가 조금 무서웠습니다. 왠지 사람들은 도깨비 같이 보였고 사랑방에서 무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는 상임활동가들은 도깨비 왕쯤으로 보였습니다. 처음 이런 낯섬이 사실은 아직 전부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제 성격 탓이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묘하게 낯설었던 그 분위기도 낯선 그대로 적응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방은, 그리고 영화제는 이런 곳입니다. 어색한 분위기도 거짓 없이 어색해서 그 어색한 분위기마저 편안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제가 1년 남짓 영화제에 있으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배우려고 하면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즐기려고 하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 패기 넘치는 마음으로 인권에 대해서 많은 걸 공부해야지 마음먹었을 때는 뭐든 어려워 보였고, 인권이라는 말 자체도 다른 나라 말 같았습니다. 그러나 영화제를 겪으면서 그냥 즐기자 생각하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는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땀 냄새 가득하고 사람 냄새 가득한 영화제. 그 안에서 울고 웃는 우리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영화제를 만들어 가는 모든 사람들. 영화제를 통해 저도 이제는 조금은 진실 되고 따뜻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자원활동가 출동
열사들의 뜨거운 안식처, 모란공원에 다녀오다
설을 한 주 앞둔 평일 낮, 인권영화제 활동가들과 함께 모란공원을 찾았다. 청량리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내렸다. 모란공원은 마석에 위치한 사설묘지인데, 모란공원의 일부인 '민주열사묘역'에 많은 열사들이 안치되어 있다. 전태일 열사부터 얼마 전 장례를 치른 용산참사 열사들까지.
도로 옆 허허벌판에 불쑥 자리 잡은 모양새도, 공원 안의 유난스런 정적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텅 빈 공원에 부는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묘지의 스산함보다는 공원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4.19 국립묘지나 현충원 같은 국립묘역에서 풍기는 인공적인 분위기, 좌우대칭으로 구획된 획일적인 모습이 아니어서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었다.
88년 6월,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외치며 분신한 박래전 열사도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지도를 보고 묘소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묘소 주변에는 군데군데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열사의 묘소 앞에서, 흔들리더라도 꺾이지 않고 영화를 통해 인권을 이야기하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박래전 열사 묘소의 왼쪽에는 전태일 열사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묘에도 분향을 하고 그 앞에 잠시 자리 잡고 앉았다. 해가 기울어가고 공원에는 여전히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공원 문을 닫는 5시가 거의 다 되어 입구로 내려가는 중에, 용산참사 열사 분들의 묘소를 찾아보았다. 역시 묘 위치가 지도에 표시된 것과는 좀 달라서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겨우 묘소를 찾고 보니,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아 봉분에 잔디를 입히지 못한 상태였다. 추운 겨울바람을 맞고 나란히 선 다섯 개의 흙무덤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아파왔다.
민주열사묘역에 묻힌 사람들 중 몇 명을 빼고는 대부분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열사들이었다. 그건 나의 무관심 때문일 것이고, 끊임없이 열사들을 만들어내는 이 나라의 부조리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요구하며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이 떠올랐기에, 그 날 모란공원이 유난히도 조용하게 느껴졌었나 보다. 올해 인권영화제가 끝나고 날이 따뜻해지면 한 번 더 이곳을 찾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