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 지울 수 없는 기억 Chile: The Obstinate Memory

칠레 : 지울 수 없는 기억 Chile: The Obstinate Memory

칠레 : 지울 수 없는 기억 Chile: The Obstinate Memory의 스틸사진
감독
파트리시오 구즈만
상영시간
58'
제작국가
칠레
장르
다큐멘터리
출시년도 1997
색채
color
포맷
화면비율
자막
배급

상영정보

해외 상영작

시놉시스

구즈만 감독은 전설적인 영화 를 23년만에 칠레로 들고 가서 상영한다, 자신의 카메라와 함께. 35개국에서 상영되었고, 여섯 개의 상을 받은 그 영화가 정작 칠레에서는 처음으로 상영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필름 뭉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피노체트에 의해 꺾인 아옌데 민중 정권에 대한 기억이며, 다시 부르는 혁명가였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 기억에 가장 직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 즉 대통령 경호대였던 사람들에게 구즈만 감독은 묻는다. 세계 최초로 선거로 뽑힌 민주주의 민중 정권과 아옌데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묻는다. 그들은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 여전히 평등한 이념을 믿으며, 그 믿음이 꺾이면 우리의 삶이 형편없어 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은 그것을 모른다. 세계 최초로 민중 정권을 무너뜨린 피노체트를 칭송하거나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아옌데를 비판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흐느끼며, 말도 채 잇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싸구려 인간 드라마가 아니다. 주인공이 눈물이라도 비치면 감동하고, 어려운 환경을 극도로 보여주는데 만족하는, 그런 '드라마 같은 다큐'가 아니다. 자료 화면을 남발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끌어가는 것을 자제하며, 감상에 젖지 않고 현재 속에서 과거를 캐묻는다. 구즈만 감독에게 역사는 과거가 아니며 현재이며, 비극이 아니라 행복한 결말이다. 행복한 결말 속에 곁들여있는 비극에 대해 그는 말하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것, 사람들은 그것을 만든다."는 신념. 그 신념이 필름 곳곳에서 화면 속의 총알처럼 튕겨 나온다. 다시 우리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전세계 민중의 연대, 기억의 연대, 신념의 연대를 재촉한다. 영화의 힘!

감독소개

파트리시오 구즈만

1941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출생하여 칠레 대학에서 철학과 연극, 영화를 공부했다. 아옌데 정부와 피노체트 구데타에 관한 최고의 연대기로 평가받는 <칠레 전투>를 만들었고 1982년에는 극영화 <La rose des Vents>로 칸 영화제 Directors' Fortnight에 초청받았다. 1989년 라틴아메리카 민중들과 종교를 그린 다큐멘터리 <La Croix du Sud>과 1996년 칠레로 돌아가 칠레 민중들의 영원한 기억을 그린 <칠레: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만들었다.

인권해설

" ......칠레 국민 여러분, 방송이 앞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작별의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이 역사적 시점에서 나는 인민에 대한 충성을 목숨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연설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칠레의 군인으로서 맹세를 배반한 자들에게는 도덕적 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들은 힘이 있고 나를 부술 수 있지만 사회의 전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국민들은 역사를 창조할 것입니다....... 나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누군가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 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칠레여, 영원하라."

1973년 9월 11일 대통령궁을 폭격하고 육군기갑부대가 대통령 집무실로 육박하는 가운데 고별 연설을 마친 65세의 대통령은 차마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한 42명의 경호대와 함께 장렬하게 죽어갔다. 선거를 통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던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비장의 최후는 인민 연합 정권의 종말을 극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민 연합 정권의 근원적 한계와 오류, 그리고 이후 칠레 민중의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옌데는 1933년 사회당을 창설하였고, 1970년 9월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세계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탄생시켰다. 아옌데는 전형적인 식민지 종속국이었던 칠레에 농지 개혁을 단행했고, 임금과 복지를 개선했으며, 칠레 인민의 젖줄인 구리 광산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자국의 30대 다국적 회사 가운데 24개가 칠레에 진출해 있고, 은행을 제외한 칠레의 18대 기업이 모두 이들의 자회사이며, 칠레의 구리 사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던 미국은 두려움을 느꼈다. 미국은 구리 수입을 중단하고 생산재, 생화 필수품의 수출을 중지하여 '생산력 감퇴와 실업, 물자난'을 조성하면서 인민 연합 정권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으며, 국내 반혁명 세력을 규합하여 반인민 연합을 결성케 하는 한편 칠레 군부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여 쿠데타를 준비한다. 이에 편승하여 반인민 연합은 운수노동자 파업을 사주하여 경제를 교란하고, 1972년에는 자본가 파업을 조종한다. 결국 미국의 3년여에 걸친 공작 끝에 육해공 경찰군의 합동 쿠데타로 인민 연합 정권은 무너지고 만다.

아옌데에 의해 군참모 총장으로 임명된 지 불과 19일 만에 쿠데타를 일으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17년간의 집권 기간은 암흑의 시대 그 자체였다. 그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콘도르 작전'이란 이름으로 좌익 소탕 작전을 실시하는 등 폭압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3,197명이 정치적 이유로 살해되고 1,102 명이 실종되었으며,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 추방자 100만 명이라는 통계치가 보여주듯 그는 인간 도살자나 다름없었다.

그는 1988년 집권 연장을 묻는 국민투표가 압도적 표차로 부결된 뒤 1989년 19년만에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반군정파인 아일윈 후부에게 패배하여 1990년 권좌에서 물러나고서도 계속 군참모 총장직을 지키다 1998년 3월 초 퇴임해 종신 상원 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0년 헌법을 바꿔 1998년까지 군총사령관직을 갖도록 규정해놓는 등 치밀하게 퇴임 이후를 대비해놓은 것이다.

1990년 민정으로 복귀한 칠레는 1994년 3월 에두아르도 프레이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민정 2기에 들어갔다. 그는 대통령 직속 기구로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정 당시의 사실을 밝히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조사가 실시됐고 수천 명이 증언을 했으며 1천 쪽에 이르는 보고서가 작성됐다. 그러나 조사는 '진실을 밝히되 처벌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진행되었기 때문에 희생자의 이름은 기억되었으나 범죄자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프레이 대통령은 과거 군정 관련자들을 정면으로 응징하기보다는 국민들 사이에 깊어진 감정을 끝을 메우는 데 그치고 있다는 지적으로 받았다.

힌편 1998년 10월 16일 독재자 피노체트가 신병 치료차 머물던 런던에서 재임시 200여 명의 스페인을 살해, 납치한 혐의로 체포됨으로써 그는 전세계 양심 세력이 기다려온 인권법정에 오르게 될 것이다.

<최서영 / 인권운동사랑방 자원봉사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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