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를 점거하라

국회를 점거하라

국회를 점거하라의 스틸사진
감독
해바라기운동다큐멘터리프로젝트
상영시간
120'
제작국가
대만
장르
다큐멘터리
출시년도 2014
색채
컬러
포맷
HD
화면비율
16:9
자막
Korean
배급

상영정보

맞서다: 마주하다, 저항하다
해외 상영작
International Film
2016/05/30(월) 13:00
성미산마을극장

시놉시스

2014년 3월, 대만 국민당은 중국과의 서비스업 상호 개방을 골자로 하는 양안서비스무역협정(CSSTA)을 30초 만에 졸속으로 본회의에 상정했다. 이에 반발하는 대학생과 사회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3월 18일, 입법원(국회)을 점거하게 되면서 운동은 대만 전체의 큰 이슈가 된다. 영화 <국회를 점거하라>는 318 국회점거를 시작으로 한달 여간 지속된 해바라기학생운동(太陽花學生運動) 현장 구석구석을 찾아가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냈다. 운동을 이끈 학생 지도부부터 운동에 가담한 NGO 인사, 거리로 나온 여권 성향의 학생, 그리고 이들을 진압하고자 하는 경찰 관계자까지.

이 영화에서 ‘국회’ 정치에 관심 없던 이들이, 정치적 각성을 통해 정부에 불만을 표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정부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겨놓고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맞서겠다는 다짐이 시작되는 곳이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세정

감독소개

감독사진

해바라기운동다큐멘터리프로젝트

<국회를 점거하라>는 2006년에 대만 최초로 설립된 독립영화제작자조합인 타이페이다큐멘터리영화제작자조합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조합은 독립다큐멘터리영화 제작자들의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호하고 노동조건을 향상하는 데 주력해왔다. <국회를 점거하라>는 조합의 지원을 받은 첫 공동 프로젝트이다. 책임 프로듀서 허 자오티와 차이 총롱을 포함해 푸 위, 왕 페이펀, 천 위칭, 차이 징루, 황 자오후이, 리 지아화, 리 후이런, 저우 스룬 감독이 참여했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여했다. 후원은 주로 온라인으로 진행되어 3154명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이것은 대만 역사상 가장 큰 공동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이다.

인권해설

2014년 3월 18일에 발생한 대만 국회(입법원) 점거는 참여자들마다 입장, 이념, 심지어는 요구안까지 상이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투쟁을 이해하는 방식도 각자 다르다. 해바라기운동(太陽花運動), 318운동, 학생운동, 서비스무역협정 반대운동. 이 운동이 어떤 호칭으로 불리건, 어떤 이념을 담았다고 판단하건 간에 모두가 동의하는 명제가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상상은, 이 운동을 계기로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는 점이다.

과거 대만은 오랜 세월 계엄 하에 있었다. 당시 권위주의 정권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과 정적(政敵)들을 제거했다. 심지어는 일반 국민도 피해를 입은 경우가 있어, 나이가 있는 대만인 대다수는 정치를 기피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정치와 조금이라도 관련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대만의 청년 세대에도 영향을 미쳐 청년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가족이 가장 먼저 이를 말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상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억눌려 다시 싹틀 기회도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대만인들은 그동안 정치를 자신과 관련 없는 영역이나 더러운 영역으로 여겨,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318 국회 점거는 정치에 참여한 적 없거나, 참여하는 방법을 모르던 이들을 ‘정치적인 장소’로 몰아넣었다. 그곳은 국회 점거 현장이기도 했고, 친구들과의 대화나 수업 내용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미디어에서 전해오는 소식이기도 했다. 대만 사회 전체가 굉장히 ‘정치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정치적 역량이 318 국회 점거를 계기로 다시 피어나,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는 단체나 개인들은 정치 공간에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순간에 대만 사회는 정치에 대해 서로 논쟁하는 분위기로 변모했다. 이를 원래 좋아했건, 반대했건, 관심이 없었건 관계없이, 도처에 ‘정치’가 있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타인과 의견을 주고받게 되었다.

혹자는 318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청년 세대가 각성한 세대가 되었고, 당국의 교육,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들이 대만을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세대로 변모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318이 ‘계몽’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318은 우리가 첫 발걸음을 내딛게 만들어준 하나의 계기일 뿐이며, 이후에 나아갈 방향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해바라기운동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지금, 어떤 참여자는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어떤 이는 그토록 타도하고 싶어 하던 그들의 편에 서 있다.

318 국회 점거는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318 이후로 2년이 지났지만, 성장의 고통은 아직도 대만 전역과 모든 참여자들을 휘감고 있다. 이 성장이 대만에 가져다 줄 결과가 어떨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우 보웨이 吳柏緯 (대만 독립언론인)

번역 세정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스틸컷

스틸컷 1
스틸컷 2
스틸컷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