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175조 Paragraph 175

형법 175조 Paragraph 175

형법 175조 Paragraph 175의 스틸사진
감독
롭 엡스테인 & 제프리 프라이드먼
상영시간
81'
제작국가
미국
장르
다큐멘터리
출시년도 2000
색채
포맷
화면비율
자막
배급

상영정보

해외 상영작

시놉시스

1920년 베를린은 동성애자의 천국이었고 게이와 레즈비언은 공개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가 장악하면서 상황은 변한다.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동성애를 금하는 형법 175조에 따라 10만명의 동성애자가 체포되었다. 그중 일부는 감옥에 갇혔고 나머지는 집단 수용소로 보내진 후에 약 4천명만 살아남았고, 현재는 그 중 10명 이하만 생존하고 있다. 전쟁이 한창인 베를린에서 도망자를 돕는 일을 했던 반유대 게이 레지스탕스 전사,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도망한 유대인 레즈비언 여성,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다 풀려난 후에 남성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군에 입대한 독일인 사진사, 수용소에서 자신의 연인이 고문당하고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프랑스 10대 소년 등.. 이 영화는 생존자 5명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그것을 견디어내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형법 175조는 기억, 역사, 주체성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감독소개

롭 엡스테인 & 제프리 프라이드먼

롭 엡스테인 Rob Epstein20살때 다큐멘터리 Word Is Out의 스탭으로 영화 제작일을 시작하였고 후에 이 다큐의 공동 연출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수많은 TV용 논픽션 작품을 만들었으며 다큐멘터리 '하비 밀크의 시대: Times of Harvey Milk'와 'Common Threads'로 오스카 상을 수상하였다. 그 외에도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가장 실력있는 논픽션 영화 감독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주요 작품The AIDS Show: Artists Involved with Death and Survival(1986, Peter Adair와 공동 연출)하비 밀크의 시대: Times of Harvey Milk(1984)Common Threads(1989)제프리 프라이드먼 Jeffrey Friedman뉴욕에서 아역 배우를 거쳐 유명 편집실에서 영화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NBC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Lifeline의 편집을 하였고 그 외에도 다수의 TV 다큐멘터리 편집을 하였다. 롭 엡스테인과는 <하비 밀크의 시대>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처음으로 공동 작업을 하게 되었고 이후 영화 제작 팀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현재 스텐포드 MFA 프로그램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인권해설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소재로 나치 정권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왔다. 하지만 유태인의 가슴에 별모양의 낙인을 찍어 강제수용소로 내몰 때 역시 분홍색 역삼각형의 표식을 달고 강제수용소로 내몰린 수만 명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기록이나 추모는 말하여지지 않았다.

독일은 19세기 후반에 칼 하인리히 울리히(1825~1895)가 동성애를 '우라니언(천상의 사랑)' 또는 '제 3의 성'이라 규정짓고 동성애자를 핍박해서는 안 된다는 운동을 펼치고, 독일 입법회의에서 연설을 할 정도로 동성애자의 인권향상에 있어서 선구적인 국가였다. 20세기에 들어 울리히의 뒤를 이어 마그누스 히르쉬펠트(1868~1935)가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를 창설해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한 형법 175조를 폐지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기 전에 1933년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히틀러는 곧 동성애자를 독일의 힘을 약화시키는 변태의 무리로 규정하고 일거에 없애버릴 대상으로 삼았다. 히틀러는 수상이 된 3주 후에 법적으로 게이조직의 결성과 활동을 금지시켰고, 한 달 뒤엔 게이 운동가들을 수용소로 보냈으며, 1934년엔 비밀경찰 게슈타포에게 형법 175조에 의거해 동성애자들의 명단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동성과 성행위를 한 이뿐만 아니라 단지 동성애를 생각해 본 사람들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175조로 인해 수용소에 감금되거나 죽은 이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전후 보상을 받은 유태인에 비해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형법 175조는 여전히 유효했기에, 보상이나 억울함을 탄원하는 것을 감히 시도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심지어 수용소에서 감옥으로 옮겨져 형을 지낸 동성애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만오천여명의 동성애자들이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알려졌지만 이것은 단지 최소한의 수치일 뿐이며, 실제 나치 정권 하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일상의 권리를 빼앗기고 강제 수용소나 감옥에 갇히는 등 박해받은 이들의 숫자는 수만 명에서 수십 만 명에까지 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를 뿐이라는 작은 차이가 차별이 되고, 그 차별이 권력과 결탁되었을 때 빚어지는 비극을 우리 인류는 이미 경험했다. 이런 역사의 비극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채윤 / 버디 편집장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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