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에서 온 5개의 인권소식 Once Again, Five Human Rights Stories from Palestine

팔레스타인에서 온 5개의 인권소식 Once Again, Five Human Rights Stories from Palestine

팔레스타인에서 온 5개의 인권소식 Once Again, Five Human Rights Stories from Palestine의 스틸사진
감독
이스마엘 하바쉬 등
상영시간
57'
제작국가
팔레스타인
장르
다큐멘터리
출시년도 2002
색채
포맷
화면비율
자막
배급

상영정보

해외 상영작

시놉시스

예루살렘, 가자, 라말라 등 5개 지역의 청년 감독 5명이 만든 현재의 그 곳 소식이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달하고 있다.

감독소개

이스마엘 하바쉬 등

인권해설

아마도 최근 국제정세에서 주목을 끌고 있는 사안을 꼽으라면, 당연하게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살육전'일 것이다(이것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이라고 보통 부르지만, '갈등'이라는 표현에는 이스라엘의 비인간적인 '폭력'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 구약의 '다윗과 골리앗'의 일화가 현대에도 재현된다면, 그것은 팔레스타인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조직적인 군사도 없고, 본격적인 전쟁을 벌일만한 자원과 돈도 없는 팔레스타인이 자생적으로 선택한 '자살공격'은 다윗의 돌팔매에 유비되며, 그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은 마치 골리앗의 집채만한 칼과 방패와 같다―최신형 전투기와 헬기, 탱크의 무차별 폭격, 어쩌면 그보다 더하다.

갈등의 시원은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이 벌어지던 1차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전쟁에 아랍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유대인들의 자금과 지원을 얻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다. 물론 실제 지켜진 약속은 후자였고, 이로부터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시작된다. 영국은 이후 벌어지는 갈등과 폭력의 상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고 그 책임을 유엔에 떠넘기게 된다. 하지만 유엔이라고 해서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결국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결의안' 만을 제출한다. 뒤이어 이스라엘의 건국선언과 이집트의 침공으로 첫 번째 '중동전쟁'이 개시된다. 이후 연이은 4차례의 전쟁에서 아랍측은 단 한번도 이렇다할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패배한다―오히려 시리아와 이집트는 영토마져 이스라엘에게 빼앗긴다. 이후 아랍국가들의 관심은 팔레스타인의 해방이라기 보다는 빼앗긴 영토의 반환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결성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아라파트에 의해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단일조직으로 성장해간다. PLO는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병행하면서, 아랍국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권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를 순조롭게 발전시켜 UN 분할결의 당시와는 정반대의 강력한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 1973년 2월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PLO는 팔레스타인 인민의 유일한 헌법적 대표로 인정받았으며, 다음해 10월 모로코에서 개최된 5차 아랍정상회담에서는 이것을 재확인하고, 요르단은 자국의 주권이 요르단강 서안에는 미치지 않음을 공식 발표하였다. 같은 해 8월 UN 총회는 이스라엘 건국 후 최초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로 상정, 아라파트를 총회에 초청하기 까지한다. 여기서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에게 평화적이고 인종차별 없는 평화적 공존을 제창하고 민주적인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을 제안한다. 유엔은 팔레스타인 인민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이 총회의 결의사항은 이후 팔-이 간의 평화회담의 전제가 된다.

미국은 어쩌면 팔-이 갈등의 실질적인 수혜자였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공격에 사용하는 무기들은 대부분 최신식 미국산 무기들이다―그리고 미국의 무기판매의 상당수는 아랍국가와 이스라엘을 그 고객으로 하고있다. 하지만 미국의 중동전략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요한 변화를 이룬다. 이른바 '이중봉쇄'는 이라크와 이란과 같은 '깡패국가'들은 경제봉쇄, 무기사찰 등을 통해 무력화하며, 나머지 중동문제는 평화정착(또는 적어도 현상유지)을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클린턴 행정부의 이른바 'Peace Process'는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국내 역관계의 핵은 노동당이 쥐고 있었고 당시 총리였던 라빈과 아라파트의 역사적인 '오스로 협정'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갈등해결의 원칙을 만들었다는 의미밖에 갖지 못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티파다('봉기')와 자살테러는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자생적 분출이며, 따라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라파트)의 통제 밖의 일이다. 이것은 90년대 미국의 중재로 추진된 이-팔 간의 를 전후로 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급격한 관료화와 부패,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한 무대응/무능력에 대한 대중적 반경향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아라파트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해 봉합되어 있던) 자치정부 내부의 정파간 갈등의 문제가 대두한다. 따라서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체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직면한 경제위기(건국 이후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GDP의 2.9%가 하락, 실업률 10%)의 원인을 팔레스타인과의 대치 및 점증하는 테러로 파악한다. 사실, 1990년대 는 이스라엘의 경제시스템의 변화 시도(이스라엘의 하이테크 산업정책+(평화를 전재로 한)미국의 시장개방 약속+아라파트의 대중에 대한 통제 약속)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인티파다는 이러한 비공식적 콘센서스 자체를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현시기 이스라엘의 강경책은 경제위기를 정면돌파하기 위한 어쩌면 곤혹스러운 수일지도 모른다.

향후 이-팔 문제는 우선 이스라엘 내부의 정치 지형 및 사회운동의 양상(이스라엘 노동당은 현재 최악의 지지율에 허덕이고 있음)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의 정파문제의 해결양상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 사회진보연대 김용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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