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아Shoah

쇼아Shoah

쇼아Shoah의 스틸사진
감독
끌로드 란쯔만
상영시간
545'
제작국가
프랑스
장르
다큐멘터리
출시년도 1985
색채
color
포맷
화면비율
자막
배급

상영정보

해외 상영작

시놉시스

86년 베를린영화제 칼리가리상 수상총 350시간에 이르는 촬영 필름을 가지고 9시간 반으로 편집된 대장편 다큐멘터리이다. 아우슈비츠, 트레블린카 등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한 인터뷰가 장장 계속되는 이 파격적인 영화에는 자료 화면이나 배경 음악 등의 장식물은 일절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방대한 인터뷰를 지루하다고 느끼기는커녕 밀려오는 충격 속에서 계속 다음 인터뷰를 기다리게 된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영화가 아닐 수 없다. 225,000명의 유태인이 학살당한 헤움노 수용소,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시몬 스브레니크는 30년만에 헤움노 마을을 방문한다. 지금은 푸른 숲에 둘러싸여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수용소 터를 거니는 스브레니크의 증언이 이 영화의 첫 장면이자 '화두'이다. 그는 말한다. "분간하기 어렵지만 그 엄청난 짓이 저질러진 것이 바로 이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벌어진 일을 아무도 말로 표현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바로 이 '화두', 즉 홀로코스트(유태인에 대한 대량학살)란 도저히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현상이라는 인식에서 란쯔만은 출발한다. 는 이 표현 불가능의 영역을 표현하기 위한 혈투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란쯔만의 생각에 의하면 표현 불가능의 영역을 그나마 표현할 가능성을 가지는 것은 지나간 과거의 재구성 노력이 아니라 그 과거가 낳고 현재도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벌리고 있는 정신적 외상(trauma)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노력에 다름이 아니다. 이리하여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인터뷰라는 형식은 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영상에 있어서의 인터뷰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치가 유태인 학살에 동원한 유태인 노무반의 한사람이었던 모르데하이 포드프레브니크는 가스 트럭에서 시체를 끄집어내는 작업 중에 아내와 아이들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발사였던 하브라함 봄바는 가스실 앞에서 유태인 여성들의 머리를 깎다가 같은 동네에 살던 여성들을 만난다. 이 때 이들이 입은 정신적 외상(trauma)의 심연과도 같은 깊이는 '말'로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그러지는 표정, 슬픔 가득 실은 눈빛, 떨리는 목소리, 심지어는 침묵을 통해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에는 그 당시에 유태인들에 대한 학살을 "몰랐다"고 강변하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공포와 폭력 앞에 떨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고 끝난 후에는 "몰랐다"고 하고 훗날에는 잊고 싶어한다. 그리고 흔히 '휴머니즘'은 이런 자기 기만을 안락하게 감싸주기도 한다. "몰랐다" 혹은 "학살은 있었지만 그래도 따뜻한 휴머니즘도 있었다." 이런 진술은 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적 외상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다. 는 망각과 얼버무림에 대한 냉혹하고도 날카로운 비판인 것이다. 감미로운 눈물과 함께 볼 수 있는, 그리고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와 달리 는 눈물을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영화이다. 의 마지막 영상은 끝없이 뻗어나는 길이다. 바로 이 라스트 신으로써 란쯔만은 홀로코스트가 난로가에서 회상되어야 할 과거의 사건도 아니고 이미 끝나 버린 사건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 같다.

감독소개

끌로드 란쯔만

인권해설

제2차 세계 대전에 있어, 나치의 최종 목적은 전 유럽에 패권을 확립한 다음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게르만 민족이 지배하는 광대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었다. 이것이 나치의 '유토피아'였던 셈이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1933년에 정권을 잡은 나치는 밖으로 전쟁의 수행, 안으로는 이 최종 목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정치적, 유전적, 인종적 요소를 제거해 나가는 계획을 놀라운 합리성을 가지고 추진시킨다. '홀로코스트'(유태인에 대한 대량학살)라고 불리는 역상 미증유의 학살 사건은 이렇게 하여 준비되었다.

1. 'T4작전' -"생존할 가치가 없는 존재"의 말살

암호명 'T4작전'은 나치의 대량 살인과 생체 실험의 출발점이었다. 1939년부터 준비된 이 신심 장애인 말살 작전은 독일 전국에서 "생존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신심 장애인들을 6개 '안락사 시설'로 집결시킨 다음 2년 동안에 7만명 이상을 살해했다. 이들에 대한 생체 실험을 거쳐 1940년에 이들을 처음으로 일산화탄소로 살해할 것을 결정한 나치는 패전까지 약 20만명의 장애인들을 살해했다. 나치의 대량 가스 살인은 약자와 국외자(동성애자 등)를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2. 동부전선 - 공산 당원, 지식인, 유태인, 신티-로마(집시)민족에 대한 즉시 학살

동부전선 전반에 걸쳐 나치는 비밀 기동 부대를 투입하여 점령 지역의 포로, 주민 중에서 공산 당원, 신티-로마 민족을 색출, 집단적으로 총살했다. 독소전 초기 10개월 동안에 55만 명을 넘는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배기 가스를 이용한 살인 트랙도 이 때 대량 투입되었다.

3. 유태인에 대한 압박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1933년부터 보이콧이라는 형태로 시작한 유태인에 대한 압박은, 시민권 말살이나 유태인과의 혼인 금지를 규정한 뉘른베르크법(35년)으로 합법적 모습을 띠고 본격화한다. 이것은 1938년의 '수정의 밤' 사건(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조직적 테러 시작)으로 이어지는 데, 이날 밤 방화된 유태인 교회(시나고그)는 265개에 이르며, 그 무렵 생긴 수용소로 납치된 유태인만도 3만명에 이른다. 1939년에 시작된 독일 국내에서의 유태인 강제 이송은 1940년 들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완성과 더불어 확대되고 동시에 독일 점령지인 우지, 바르샤바에서 유태인 게토(도시의 일정 구역에 유태인을 가둬버림)가 생긴다.

4.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

독일의 전 점령 지역에서의 유태인과 신티-로마(집시)민족 절멸 작전이 벌어지게 되는 데 나치는 이것을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이라고 불렀다. 1942년의 반제이 회의는 '최종 회결'을 전 유럽적 규모로 조직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한 실무 회의였으며 유태인 학살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했다. 이 회의에서 모두 1천1백만 명의 유태인이 절멸 대상으로 정해졌고 실제로는 6백만 명이 학살당했다. 나치가 실행한 '절멸' 방법은 4가지가 있었다. 곧 ① '게토'에 봉쇄하여 기아와 전염병으로 사멸 ② 동부 전선 특수 부대에 의한 대량 총살 ③ 강제 수용소에서의 가혹한 노동을 통한 절멸 ④ 절멸 수용소에서 치사성 가스로 절멸이다. 즉각 'T4작전' 경험자가 조직되어, 이미 존재하던 아우슈비츠 외에, 폴란드 동부 베우제크, 소비보르, 트레블린카에 절멸 수용소(순수한 살인 공장)가 건설되었다. 영화 <쇼아>는 이들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상세히 추적하고 있다. 화물차로 이송되어온 유태인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소수의 '노동 가능자'만을 남겨두고 모두 가스로 살해당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최대 8천의 시체를 24시간 내에 소각할 수 있는 소각로를 보유하고 있었다.) '노동 가능자'는 동포의 시체 처리를 강요받는 '특별 노무반'을 형성하지만 이들 역시 나중에 총살당했다. 가스실은 자동차나 탱크의 배기 가스(일산화탄소)를 사용하거나 '치클론 B'라는, 강력 살충 소독제를 (정신 장애자에 대한 실험을 거쳐)학살에 응용했다. '치클론 B' 50그램만 있으면 몸무게 50킬로의 인간 1천명을 죽일 수 있다. (별표 참조)

5. 그 많은 죽음, 그리고 완전범죄의 기도

나치의 절멸작전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곧 ① 대규모 가스실 ② 피해자에게 범죄를 협력케 하는 체계(유태인 '특별 노무반') ③ 증거 인멸이다. 증거인멸 작업은 벌써 1942년 6월부터 '1005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시체를 캐내고 소각하여, 남은 뼈와 재를 묻은 후 정지작업을 하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는 작업이다. 전쟁 말기에는 절멸수용소들을 폭파해서 현재 절멸수용소는 남아 있지 않다. 나치스에 의한 전 유럽 비전투원 희생자수는 최하 1천3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는 유태인이 6백만명, 신티-로마민족 50만명이 포함되며, 가스실에서 죽은 350만명 중 90%가 유태인이었으므로 유태인 희생자의 반수가 가스에 의한 희생자인 셈이다.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작전명·수용소명

추정 희생자수

살해 수단

T4작전 (그 뒤를 이은 '14f13작전' 포함)

200,000

일산화탄소 가스실·차

대 소련전선 후방 및 발칸

연구 진행중(2백만 이상

추정)

일산화탄소 가스차

절멸수용소 -폴란드

 

일산화탄소 가스실

크름호프(헤움노)

225,000

 

베르제크

600,000

 

소비보르    

250,000

 

트레블린카

974,000

 

강제수용소 내 절멸공장 -폴란드

 

치클론 B 가스실  

마이다니크

50,000

 

아우슈비츠

1,150,000

 

구 독일령(1938) 내 강제수용소

12,000

치클론 B 가스실

(마우트하우젠, 노이엔가메, 나츠바일러, 작센하우젠, 라벤스브뤼크, 슈트트호프)

총계

3,461,000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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