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에 휩쓸린 문화계 “되던 일도 안된다”(경향신문)

‘코드’에 휩쓸린 문화계 “되던 일도 안된다”(경향신문)

'코드'에 휩쓸린 문화계 "되던 일도 안된다"

입력: 2008년 03월 30일 17:06:39
 

ㆍ13년째 인권영화제 상영관 안내줘 '발동동'
ㆍ'민중' '통일' 들어간 행사·작품 잇따라 불허

문화현장이 정치바람을 타면서 혼란을 겪고 있다. 한마디로 '되던 일도 안되는' 형국이다.

올해로 13년째 계속돼온 인권영화제는 상영관을 잡지 못해 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고, '민중'이란 단어가 들어간 전시는 공공기관에서 거부당했다. 남북 합의에 따라 발간된 문학잡지 역시 제작된 지 한 달이 넘도록 반입되지 못하고 있다. 재일교포 시인 초청행사조차 '레드 콤플렉스'에 부딪혀 무산됐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필두로 전방위에서 가해지던 '코드 인사' 배제 바람이 수그러지는 듯하지만 현장에서는 거센 '코드'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다.

올해 '인권영화제'에서 상영 예정인 영화 '철을 먹는 사람들(Ironeaters)'(감독 샤힌 딜리아즈, 독일·방글라데시, 2007).

1996년부터 매년 인권영화제를 주최해오던 인권운동사랑방은 올해 행사를 치를 장소를 잡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주최 측은 오는 5월 중순쯤 행사를 치르기 위해 올초부터 예술영화 상영관인 '서울아트시네마'와 독립영화 상영관인 '인디스페이스'에 대관신청을 했으나 극장 측은 전에 없던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상영등급분류 면제추천을 요구하고 있다.

현행 영화 및 비디오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등급 분류를 거치게 돼 있으며 영진위의 추천을 받은 영화제 상영영화 등 일부 영화에 대해서만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경우 등급분류 면제를 위해 영진위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주최 측인 인권운동사랑방은 추천 자체가 영화에 대한 국가의 사전검열이란 이유로 이를 거부해왔다. 그러나 상영관들은 올들어 영진위의 추천을 받아오지 않을 경우 대관을 해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국문학평화포럼이 지난달 발간한 재일조선인 시 동인 '종소리'의 대표 시선집 '치마 저고리' 출간기념 행사가 무산됐다. 사진은 종소리 동인 모임.

배경으로는 두 상영관이 모두 영진위 소유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서울시네마테크협의회가, '인디스페이스'는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영진위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영진위가 '좌파 문화세력'으로 몰리고 현재 위원장조차 공석인 상황에서 상영관 역시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전에는 영진위와 상영관의 묵인 아래 추천절차를 거치지 않은 영화를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했지만 더 이상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인권영화제 운영을 담당하는 김일숙 상임활동가는 "일단 극장상영은 포기하고 5월 말쯤 거리상영으로 대체하는 한편 문화단체들과 연대해 표현의 자유 확보와 영비법 개정을 위한 공동운동을 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민중생활사연구단이 올 7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최하려던 민중사진전 '어제와 오늘' 역시 지난 21일 유 장관의 박물관 업무보고가 열린 다음날 갑작스럽게 취소 통보를 받았다. 이 사업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03년부터 올해까지 6년간 계속된 대형 인문학 프로젝트로, 공식 역사에 가려진 민중의 생활상을 구술기록과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을 해왔다. 이 사업단은 올해 사업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국립민속박물관 측과 민중사진전을 개최하기로 구두합의했으나 "전시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게 됐다"는 사실상의 취소 통보를 받았다.

문학판에서도 정권의 '우회전'에 따른 사업 차질이 계속되고 있다.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문인회담의 후속으로 결성된 6·15민족문학인협회가 발간하는 계간 '통일문학' 창간호는 지난 2월 북한에서 발간되고 중국에서 창간기념식까지 치렀으나 지금까지 국내에 반입되지 못하고 있다. 남북한, 해외편집위원이 참여하는 이 잡지는 애초부터 정치색을 배제하자는 취지로 순수 문예작품을 골랐다. 그러나 통일부는 '어버이 수령님' 등 남한에서 이미 익숙해진 일부 표현을 문제삼아 반입을 불허하고 있다. 사업 시행 당시 기대했던 남북협력사업 기금 확보도 물건너간 일이 됐다.

한국문학평화포럼이 지난달 발간한 재일조선인 시 동인 '종소리'의 대표 시선집 '치마 저고리' 출간기념 행사의 무산도 비슷한 맥락이다. 주최 측은 이 시집의 필자인 정화수씨 등 4명을 초청하려 했으나 국정원이 이들에 대한 조사방침을 세워 방한이 무산됐다. 이들은 2004년 조총련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2006년 광주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기념행사 재일동포 대표단으로 두 차례 방한한 적이 있다.

이 같은 사업 차질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정치와 독립적으로 추진돼야 할 문화 사업들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후진적인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원용진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서강대 교수·신문방송학)은 "문화 관련 NGO나 진보학계에서는 이전 정부에서 당연히 생각하고 추진했던 여러 사업들을 원점부터 재검토하고 시민 사회에 납득시키는 한편 정부와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 한윤정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