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활동가 편지) 세상이 찾지 않는 말
글쓴이: hrffseoul@jinbo.net | 글쓴날: 2018/03/14
한참 동안 백지를 보고 있었어.
머리 속에 쉬운 말들만 생각났거든. 나는, 너는, 우리는, 아프다, 약을 먹는다, 꿈을 꾼다.
요즘은 그 어떤 명확한 말도,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어.
너무 명확한 말들. 너무 명확해서 너무 가벼운 말들. 그 말들에게서 벗어나려고.
세상이 찾지 않는 말을 찾는 중이야.
한참 동안 백지만 보고 있었어.
어떤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어떤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만 한참을 하고 있었지.
그렇잖아? 아무리 세상이 미워도 시간은 계속 가고, 내일은 찾아오니까. 나는 아직 살아있고 누군가는 나를 궁금해하니까.
다시 입밖으로 손끝으로 나의 몸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내야해. 나도 뭔지 모르는 것들을 토해내서 한참을 보아야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계속 아무것도 알 수 없을테니까.
친구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고양이 소리를 내보라고 했어. 그렇더라고. 사람의 소리는, 글은, 내가 아는 것을, 느끼는 것을 조금도 설명하지 못하는 걸. 깔끔한 문장. 정확한 설명. 빈틈없는 논리 구조.
잘 다듬어져서 결국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까지 사용되는 언어들. 하지만 왜 그 안에 중요한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까.
세상이 찾지 않는 말을 찾는 중이야.
어쩌면 말보다 고양이 소리에 가까운, 그것도 아니라면 몸짓에 가까울
나는 이 글을 다 쓰고 백지 밖의 삶을 살아갈거야.
언어는, 너무나 명확한 백지 위의 검은 글씨들은 사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평면의 글씨로 설명 할 수 없는 입체적인 나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 할 수 없는 순간들에 웃고 울겠지.
그래도 너가 괴로울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무슨 표정을 하고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계속 바라볼게. 기쁠 때는 어떤 감탄사와 눈빛과 몸짓을 하는지 지켜보며 함께 웃을게.
우리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잊지 않고, 너무 간단한 것들을 의심할게.
그러다보면,
어쩌면,
우리는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