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X서울인권영화제) 당신과 나의 씨씨에게

(차별금지법X서울인권영화제) 당신과 나의 씨씨에게

* 차별금지법 제정을 향한 움직임이 뜨겁습니다. 울림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 서울인권영화제의 지난 상영작 <씨씨에게 자유를!>과 함께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는 글을 싣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씨씨에게 자유를!〉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오는 말이 있다.

‘트랜스젠더 주인공이 죽지 않는 다큐멘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어요’

〈씨씨에게 자유를!〉을 본 이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관객들은 씨씨를 둘러싼 시선에 분노하고, 살아남아 투쟁해가는 씨씨의 생명력에 감사하며, 씨씨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 현실에 다시 한번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의 감상은 분노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위의 문장은 마지막 분노 이후의 짧은 침묵을 깨고 누군가가 나지막이 뱉어내는 말이다. 참을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분노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 것. 우리의 연대는 가해의 수단이 아니므로. 우리의 연대는 미약하고 위대한 생존을 향하기에.

씨씨는 유색인종 트랜스여성이다. 그녀는 길에서 혐오범죄를 당했고, 자신을 보호했고, 그 결과 2급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언론은 씨씨의 생존을 ‘상해치사 사건’이라 규정했고, 검찰은 씨씨가 백인 남성을 의도적으로 살해했다 ‘인정’할 때까지 그녀를 심문했다. 그때 씨씨는 거구의 백인 남성에게 공격을 당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에 씨씨 지지 모임 첫 회의의 연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우리가 여기 모인 건 크리샨의 죄의 유무를 가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녀가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지지하기 위함입니다.” 씨씨가 특별한 선처도, 죄의 사면도 아닌 공정한 판결을 받기 위해서는 이례적인 지지와 연대가 필요했다. 법과 권력과 안전의 경계 바깥에 놓인 삶. 제도의 언어는 씨씨를 담아내지 못했다. 유색인종인, 여성인, 트랜스젠더인, 유색인종 트랜스여성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씨씨 자신으로서의 고유한 삶. 씨씨에게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충분한 언어가 주어지지 못했다. 

사진1. 영화 <씨씨에게 자유를!> 스틸컷. 왼쪽에는 씨씨가, 오른쪽에는 배우 레버른 콕스가 있다. 둘은 벤치에 앉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1. 영화 <씨씨에게 자유를!> 스틸컷. 왼쪽에는 씨씨가, 오른쪽에는 배우 레버른 콕스가 있다. 둘은 벤치에 앉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저는 살면서 학대와 폭력을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졌어요, 제가 트랜스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그냥 막연하게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흑인 트랜스 여성인 제가 목숨을 구걸할 때 제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백인으로서의 자기 우월감을 확인시켜줄 때 이 백인 남성이 흥분하는 모습을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해요” 

그러나 씨씨는 부재한 언어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씨씨의 말은 그녀가 몸에 새긴 불사조 같은 몸짓으로, 광장에서의 외침으로, 그녀의 삶 전체로 다가온다. 씨씨가 온몸으로 뱉어낸 그녀의 삶은 영화 속 연대자들이 씨씨가 수감된 감옥의 외벽을 두드릴 때의 리듬에 맞춰 하나의 울림이 된다. 그 울림은 너무나도 고유하고 너무나도 복합적이어서 무엇 하나로 규정할 수도, 어느 저명한 용어들로 파편화할 수도 없다. 이에 우리는 제도의 바깥으로 내몰린 모든 삶들을 떠올릴 때마다 씨씨의 이름을 되뇌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함에 있어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떠올리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씨씨에게 자유를!〉에 대해 생각할 때 이따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씨씨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는 장면인데, 거리에서의 연대나 씨씨의 생명력만큼 강렬하지는 않아도 잔상이 오래 남는 장면이다. 씨씨의 어머니는 트랜스여성인 씨씨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종종 그녀(she)를 ‘그(he)’라 칭했고, 크리샨이 아닌 크리스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씨씨의 엉망인 머리나,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엄마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어쩌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한다는 것은 이런 일일지도 모른다. 거창하고 세련된 설명보다도 살과 살이 맞닿은 삶의 감각이 그 당위를 증명한다. 씨씨가 ‘씨씨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마주하는 것. 나의 신념이나 이념 쯤은 그 벅차고 버거운 삶의 약동 앞에서 기꺼이 무너지고야 마는 것. 왜냐하면 그것이 씨씨의 일이니까. 씨씨니까. 당신의, 나의 씨씨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씨씨는 씨씨이기에.

 

세상의 모든 씨씨에게,

당신과 나의, 그러나 우리의, 씨씨에게.

씨씨에게 자유를.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권태